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돌아오지 못하는,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에디터. 전지윤 자료제공. 눈빛 사진. 김지연

“그럼, 와서 사진이나 찍지 와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노?”
1998년 나눔의 집에서 박두리 할머니가 무심한 듯 건넨 이 말에는 피로하고 지친 젊은이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깃들어 있다. 사진작가 김지연은 가혹한 역경을 감내하고 살아남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사진에 담으면서 자신이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현대사의 상처를 지닌 피해자들을 만나고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의 실태, 도시 빈민과 이주 노동자의 권익 문제 등을 취재하며 지난 20여 년의 시간을 채워왔다. 특히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연변으로 간 아이들』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 『러시아의 한인들』『거대공룡과 맞짱뜨기』 『일본의 조선학교』 『사할린의 한인들』이라는 여섯 권의 사진집을 묶어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펴냈다. 이전에 미처 담지 못했던 에피소드와 후일담을 더해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한 이 책은 이산 동포에 대한 20년 취재의 결실이며, 김지연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 밟아온 성장과 성숙의 기록이다.
머리를 바짝 깎은 남자아이가 얼굴만 내민 채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 “탈북 어린이, 중국 연길. 1999”라는 캡션 외에이 아이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숨는 게 일상일 테지만 구부정하거나 주눅 든 기색 하나 없는 아이가 왠지 기특하다. 숨바꼭질을 하던 참이었을까, 아이 얼굴에는 엷은 미소의 흔적이 묻어난다. “한국 기자에게 사진 찍히면 북에 돌아가 죽는다” 는 염려가 마음에 걸리면서도 자신과 즐겁게 놀아준 사람에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 앞에 선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엄마 나 찾아봐!’ 하면서 제 눈만 가리고 숨던 내 아이 의 모습이 겹쳐져, 사진 속 아이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나는 탈북자들을 만나는 동안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굶주림에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그들 앞에서 보이는 나의 눈물은 한낱 소녀 감성에 지나지 않을 뿐일 테니까.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짐을 챙길 즈음 그렇게 눌려있던 감정들이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근처에 있는 옥수수 밭으로 혼자 들어가 내 속에 쌓아두었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그렇게 한참을 ‘엉엉’ 소리 내어 울고는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날 옥수수 밭의 오열은 이후 나의 사진이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찾아나서는 계기가 된다.”
중국 국적을 가졌지만 한민족의 일원으로, ‘조선족’이라고도 불리는 중국 동포는 ‘중국인들은 굶어도 조선족들은 이밥(쌀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근면하게 살아왔다. 독립 운동, 생계 유지, 피난 등을 이유로 중국으로 향했지만 이들의 마음 속 고국은 여전히 한국이다. 냉전 시대가 마침내 막을 내리고 한중 수교가 정식으로 수립된 1992년 이후, 이들은—아마도 설레는 마음을 안고—대거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 초기에 주로 한국 친지들의 초대 형식으로 한국에 방문했던 중국 동포들은 점차 식당이나 일용직 노동과 같이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체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환영과 격려는 고사하고 차별과 멸시, 냉대만 있을 뿐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궂은 일도 마다할 수 없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은 곤궁하다. 중국 동포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을 보필하고 여생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은 손에 닿을 듯 하다가도 자꾸만 멀어져 갔다. 손가락이나 손목이 잘리는 사고, 전신에 화상을 입는 산업재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 온갖 피해와 인권유린을 당하고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인한 강제 추방이 두려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사람들, 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집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이들이 도움을 청하러 ‘성남 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에 모여들었다. 억울한 사람들이 둘러 앉은 방에는 커다란 짐 가방과 박스, 이불보가 한쪽 벽을 가득 메우다 못해 천장까지 쌓여 있다. 마치 저마다 가진 억울한 사연이 공간을 꽉 메운 듯하다. 그뿐인가. 지하 창고에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는 유골함들이 쌓여있다. 허름한 나무 판자 위에 보자기로 싼 유골함 여러 개, 그 위에 유성매직으로 적힌 이름을 보고 있자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조차 감이 오질 않는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는 사할린을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 등 곳곳에 퍼져 살고 있는 동포들의 역사와 현재가 담겨 있다. 1860년대, 함경북도 지방의 농민들은 흉년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떠나 러시아 극동지방인 연해주로 향했다. 훗날 ‘고려인’으로 불리게 된 이들은 근면 성실하게 맨손으로 정착지를 일구었으나, 살만해지면 번번이 낯선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1930년대 일본의 침략 활동을 경계하던 스탈린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데서 끝나지 않고, 구소련의 붕괴 이후 또다시 이주해야 했다. 소수민족 중에서도 높은 교육열과 성실함을 인정받아온 이들이지만 열악한 상황 탓에 고려인 후손들은 근근이 생계를 꾸려간다.
“‘삶이 억울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라가 한 일인데 어쩌겠냐’며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세월을 용서한 동포들은 얼음 땅에 묻히고 우리에게서 잊혔다.”
‘계절농을 위한 고려인의 숙소’는 한켠에 쌓아놓은 약간의 장작과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개가 없었다면 버려진 곳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볼고그라드의 정착촌에서 만난 고려인 노인의 주름은 “역사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지금도 끝나지 않는 방랑”의 증거다. 그럼에도 고려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한번 삶의 터전을 일구고 언어와 문화, 풍습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진작가를 정성껏 대접하고 다정히 미소 짓는 이들에게서 살가움과 따뜻함이 묻어난다.
‘계절농을 위한 고려인의 숙소’는 한켠에 쌓아놓은 약간의 장작과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개가 없었다면 버려진 곳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볼고그라드의 정착촌에서 만난 고려인 노인의 주름은 “역사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지금도 끝나지 않는 방랑”의 증거다. 그럼에도 고려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한번 삶의 터전을 일구고 언어와 문화, 풍습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진작가를 정성껏 대접하고 다정히 미소 짓는 이들에게서 살가움과 따뜻함이 묻어난다.
김지연의 사진으로 만난 인물들을 마음에 담아본다. 깊이 패인 주름에 스민 고운 웃음, 잘린 손가락과 꽃을 만지는 온전한 손, 차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늘 위험에 노출된 채 꽃제비로 살아가는 아이들, 거친들판에 선 고려인 아이들까지…. 나도 모르는 새 이방인으로 여기고 있었을지 모르는 이들을 오롯이 품어본다. 차가운 시선과 고달픔에도 미움과 원망 없이 꿋꿋이 자신만의 뿌리를 내리는 이들에게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 자신들의 생을 쏟아부은 터전에서 오늘도 외부인으로 여겨지며 떠밀리듯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선택한 곳이 머지않아 온전한 그들의 집이 되기를.
June21_Inside-Chaeg_02_05
Please subscribe for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