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민족주의

에디터: 선주, 박중현

인류는 수만 년 동안 부족과 씨족으로 된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민족’이라는 이름은 공동체를 한마음으로 묶고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 이름 아래 개인이 지워지기도, 다른 민족을 배척하기도 한다. 필연적으로 민족에 속해 살아야 하지만 민족으로 산다는 건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민족주의’란 이데올로기는 대체 무엇이며, 나를 어떤 민족으로 살게 만드는 것일까.

1—민족의 발명
‘민족’의 기원
민족주의를 살펴보기에 앞서 그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서양 각국에서 민족은 네이션/나시옹/나치온nation, 나치오네nazione, 나시온nacion 등으로 표기되는데, 이 말들은 모두 나티오natio, 나투스natus, 나스코르nascor 등의 라틴어를 공통의 뿌리로 지닌다. ‘나티오’로 대변할 수 있는 이 개념은 고대 로마 정치가이자 저술가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기원전 106~43)가 ‘출생의 여신’으로 의인화했을 정도로 본래 출생과 관련된 것이었다. 또한 키케로가 유대인과 시리아인을 가리켜 “노예로 태어난 민족들nations natae servituti”이라고 표현한 것 역시 나티오가 출생의 공통성으로 묶인 집단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로마인 입장에서 타국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민족’과 방향성이 달랐다. 로마인이 보기에 자신들과 생김새, 옷, 음식 등이 다른 외국인은 별난 존재였고, 그들을 가리키는 ‘나티오’ 역시 그다지 긍정적 용어는 아니었다. 이후 중세에 들어 대학의 동향 집단이나 의회에서 동향 출신 대표들을 가리키는 말nation로도 사용되는데, 이때 비로소 일종의 ‘의견 공동체’ 같은 뉘앙스로 그 의미가 긍정적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17세기 들어 부패한 ‘궁정’에 맞서는 ‘지방’으로서 검소와 절제의 미덕을 내세우며 네이션의 가치는 뚜렷이 상승했고,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거쳐 드디어 ‘본질적인 주권의 소유자’로서 ‘나시옹’이 프랑스 국민 의회가 선포한 인권 선언 3조에 그 이름을 올린다. 본디 자연출생적 인간을 (그것도 타자를) 가리키던 ‘나티오’가 정치혁명적 시민(주체)인 ‘나시옹’으로 진화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도 우리가 ‘민족’ 하면 떠올리는 단단한 (혈연)공동체적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주의-ism’로써 제창되며 선택된 근대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2—민족주의의 발현, 애국심과 파시즘
국가적 필요와 자기애 사이, 고대 그리스 에피타피오스 속 애국심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리키는 애국심은 사실 19세기 이후 근대 국가의 형성에 기본원리가 되었을 정도로 근대적 용어다. 또한 가슴 따뜻해 보이는 모양새와 달리 때로는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고 자본가의 이익을 수호하며 자유를 억압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자국의 수호와 독립, 통일 등에 막대하게 기여했다. 어쨌든 한 국가가 대외적인 독립과 대내적인 통합을 유지하려면 국민의 희생은 불가피한데, 특히 전쟁이나 위기 시 국가는 국민에게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애국심의 필요다. 즉 애국심은 국가 생존과 번영을 위해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희생과 복종을 뒷받침하는 집단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애국심에 대한 역사적 모델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페리클레스의 에피타피오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3—‘우리’ 안의 한국
한국의 집단주의
일상 대화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우리’라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말하거나 글을 쓸 때도 으레 ‘우리는’ ‘우리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심지어 타인에게 가족을 소개할 때도 영어에서 ‘나의 엄마’라며 나를 중심으로 하는 것과 달리 ‘우리 엄마’ ‘우리 아빠’라고 할 정도니 한국이 ‘우리’라는 말에 얼마나 익숙한 나라인지 알 만하다. ‘우리’는 어원을 따지면 ‘울타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 한다는 소속감을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강한 집단주의 속에서 자리 잡았다.
믿기지 않지만 이렇게 한민족으로서의 우리 개념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우리 개념은 노비는 노비, 양반은 양반대로였다. 평등의식을 기반으로 외세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 신분사회를 유지하며 외세에 저항하는 위로부터의 민족주의라는 2가지 민족주의가 있던 셈이다. 조선 말 신분제가 폐지되고, 곧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이 하나로 뭉치면서 민족이라는 자각을 깨우치며 지금의 근대적 집단의식이 구축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민족성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켜 주었다. 게다가 민주화운동, IMF와 같은 움직임과 국가적 위기는 ‘한국인’이라는 결속력과 역량을 강화했다. 민족주의를 국가 차원에서 강화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기에 대한 맹세’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는 문장만 보아도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을 우선했던 맹목적인 국가주의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인권 존중 문제에 따라 2007년 일부 내용이 수정되었으나, 여전히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하여 어릴 때부터 민족 중심 사상을 교육하고 있다.) 이러한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는 강한 배타성을 띠기 쉽다. 특히 단일민족이라는 구호 아래 강한 민족성을 지닌 한국의 경우 더욱 그렇다.

December18_Topic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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