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이 세대, 저 세대, 그 세대

에디터 : 고승연, 강덕구, 서서히, 전지윤, 김원희

MBTI를 묻는 게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한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이제 “혈액형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하면 ‘옛날 사람’이라고 한다. 만나자마자 “몇 년생이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묻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은가 싶기도 하다. 세대차이는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다. 베이비붐세대에게 어느 날 나타난 X세대는 외계 생물체만큼 생경했을 것이다. X세대에게는 90년대생이 왔다. 아직 적응이 되기도 전에 2000년대생도 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큰 차이를 파악할 새도 없이 세대는 잇따라 등장하고, 서로 이해하지 않는 불신이 확산된다. 무리 짓기가 인간의 본능일지라도, 같은 무리에 속하지 않는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문제는 세대와 무관하게 모두 고민해야 한다. 세대에 붙여진 이름이 그 세대를 완전히 표현할 순 없다. 그러나 이 명명을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를 함께 살기 위한 가치 있는 시도가 아닐까?
1-‘개인화 세대’와 일하고 소통하는 법
몇 달 전까지 큰 화제를 모았던 SNL코리아의 시트콤 ‘MZ 오피스’를 보면 이미 선배가 돼 버린 밀레니얼세대조차 당황시키는 Z세대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Z세대가 가진 문제’를 들춰내 공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시트콤은 시트콤일 뿐이다. 정말로 이들 세대의 행동방식, 사고방식을 ‘문제’로 여기게 되면 한국사회는 이미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Z세대와의 필연적 충돌을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의 성장배경을 이해하고 ‘특성’으로 받아들여야만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사전에 예측하고 이후에 실제로 어떤 문제가 생겨도 이를 풀어나갈 수 있다.
Z세대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장 과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Z세대에게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연결돼 있었다. 이들 세대는 부모의 손에 항상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이 들려 있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친구들과 놀 때나 학교 숙제를 할 때도 언제나 노트북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스마트 디바이스, 모바일 기기는 이들에게 장난감이자 학습 도구였으며 온라인 쇼핑몰인 동시에 쇼핑 카트였고 은행이었다. Z세대에게 세상은 단 한 번도 ‘오프(off)’ 된 적이 없었다. 밀레니얼세대만 해도 성장기에 인터넷에 무엇인가를 검색하기 위해서는 랜선이 연결된 PC 앞에 앉아야만 했지만, Z세대는 손에 든 휴대폰과 태블릿이 언제나 ‘온라인’ 상태이므로 언 제든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글로벌 최대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하는 단어나 문구 목록의 최상위권에 항상 ‘How to~’(영미권) ‘~하는 법’(한국)이 자리 잡고 있다. Z세대에게 스마트폰, 모바일 디바이스는 도서관이고 사전이며 뇌의 연장이다. 이들을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 즉 ‘포노 사피엔스’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는 이유다.
이처럼 ‘포노 사피엔스’로 자라온 이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이들을 관통하는 특성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현재 20대 주축인 Z세대와 일부 젊은 밀레니얼세대 즉, 30대 초반까지의 사람들을 관통하는 특성은 바로 ‘개인화’다. 필자는 그들을‘개인화 세대’라고 부른다. 언론에서 주로 ‘MZ세대’로 묶는 바로 그 세대다. 이들은 앞서 설명했듯, 성장기 때부터 스마트폰을 통해 연결된 세상을 살았고, 언제 어디서든 세분화된 자신만의 입맛에 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해왔다. 콘텐츠도 자신의 취향을 파악한 플랫폼 기업 AI의 도움을 받아 소비했다. 항상 ‘나’와 ‘나의 취향’이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됐 기 때문이고, 그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흥미나 관심에 따라 상대를 선택하며 소셜미디어 속 관계 맺음을 해왔고, 오프라인 모임조차 개인적인 취미 위주로 모여 때로는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활동한 뒤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최근 인기를 끄는 독서, 취미활동 모임이 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성장 과정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모바일 디바이스를 뇌의 일부이자 연장으로 활용해 온 이들 세대에게는 기성세대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심지어 ‘무능한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어떤 정보와 지식이든 곧바로 빠르게 검색해 알아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과 그러한 능력을 형성해 준 성장 과정 및 학습 환경은 한편으로 각각의 정보가 연결되는 방식, 즉 텍스트(text)와 텍스트를 연결하는 맥락(context)에 대한 이해력을 키우기 어렵게 만들었다. 기성세대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으며 ‘서지 사항’을 적고 각 책의 참고문헌을 뒤져가며 내가 찾는 내용이 어떤 지식의 연결망, 정보의 맥락 내에 존재하는지 자연스레 깨우칠 수 있었다. 검색이 지금처럼 용이하지 않았던 만큼 부족한 데이터를 갖고 인과관계를 고민했으며, 깊이 생각했다. 검색이 쉽지 않던 시대에는 사색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2-취향 없는 세대: 어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나요?
“어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에 뻔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사람들의 대답에서 나와 공통된 취향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취향을 갖는 것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서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다 그가 영화를 배속으로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한 표현으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다고? 영화를 2배속으로 보는 사람과 내가 무슨 얘기를 한단말인가? 우리 둘 사이를 메워줄 수 있는 취향의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취향이라는 개념은 더할 나위 없이 조잡해졌다. 취향공동체를 자처하는 밀레니얼세대지만, 취향은 밀레니얼세대에 내린 어떤 저주 같은 것이다.
세대는 특성을 하나로 묶는다. 나는 『밀레니얼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밀레니얼세대라는 분석 대상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들을 조사해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세대론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특정한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서 대상의 특성을 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대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 언제나 불일치한다는 점에서, 세대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대론의 양극에서 우리는 취향 또한 양극화된다는 점을 안다. 어떤 면에서 밀레니얼세대의 취향은 존재한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을 소비자로 생각하고, SNS에 자아를 드러내는 연출에 푹빠져 있다. 동시에 그들의 취향은 알고리즘 바깥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기표현 역시 SNS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밀레니얼세대의 문제는 정확히 말해 오늘날 미디어 환경이 지닌 문제와 같다. 미디어 환경이 밀레니얼세대를 낳았고, 밀레니얼세대는 소비자로서 미디어 환경을 창조한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피드백 루프다. 누구도 요즘의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순환경로에 바로 밀레니얼세대의 문화소비가 있다는 점이다. 문화소비는 나와 우리 세계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응축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제일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며 다양한 영화를 추천받는다. 한 편의 영화가 마음에 들어 ‘정주행’했다면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 영화와 비슷한 작품들을 연달아 추천하기 시작한다. 이용자로서 나는 불현듯 착각한다. 내가 알고리즘의 추천을 취향으로 갖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취향이 아니다. 최소한의 자율성도 없기 때문이다. 취향을 형성하는 방법은 곧 내가 나를 통제하는 방법과 연관된다.
밀레니얼세대의 핵심적인 불안은 여기서 초래한다. 인류역사의 진보는 ‘나’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가능했다. 나는 ‘나’를 규제하고, 나의 성장범위를 정함으로써 나아갈 수 있다. 반면 밀레니얼세대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그들의 취향은 알고리즘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성한 공동체는 SNS의 추천에 의거한 것이다. 점차 그들은 자신의 통제력을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밀레니얼세대가 전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의를 갖추며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기불안에 있다. 예기불안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 거고, 자신이 이 일을 제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생기는 불안’을 의미한다. 불안은 미래형을 갖고 있다. 나는 이 불안 이 오늘날 밀레니얼세대의 취향을 잃게 만든 제1의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3-낀 세대의 조화로운 공존법
세대를 정확히 구분하는 일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굳이 세대를 구분하고 세대별 특징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효율성’과 ‘소속감’.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산업기술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생산을 이룩하고자 끊임없이 효율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이러한 효율성의 추구는 더욱 탄력을 받아 모든 상업적 분야로 뻗어나갔다. ‘X세대’라는 용어 역시 1993년 동방기획이라는 광고업체가 태평양화학에서 출시하는 ‘트윈엑스’라는 화장품을 광고하기 위해 미국에서 차용해 온 용어이다. 동방기획은 당시 화장품의 주요 타겟층인 20대 초반을 이해하기 위해 설문조사 등을 실시했으나 이들을 정의할만한 공통점을 찾을 수 없어 X세대라는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세대 구분은 비단 상업적인 목적뿐 아니라, 국가 정책 수립, 선거에서의 유권자 공략 등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기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세대를 구분하는 이유의 또 다른한 축은 ‘소속감’이다. 1943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해럴드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가 발표한 ‘매슬로의 욕구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그 중요도별로 다섯 단계를 형성하는데 그중 세 번째로 요구되는 것이 ‘애정과 소속의 욕구’이다. 현대 사회로 갈수록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강화되는 대신, 개인주의가 만연해지면서 인간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세대, 혈액형, MBTI 등 사회적 그룹을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소속감을 확인하며 안도한다. 이렇듯 세대 구분은 ‘효율성’과 ‘소속감’이라는 두 축을 토대로 정치, 경제, 사회, 개인적 요구에 의해 탄생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이처럼 세대 구분은 절대적 정의가 어려우며 필요에 의해 생겨난 임시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세대에 속해 있을지라도 개인의 경험과 관점이 다르고 X세대 역시 이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특징과 모습이 그들을 전부 대변할 수 없다. 다만 X세대에 속한 이들이 이 글에 공감하며 소속감을 얻고, 그 외 세대들은 X세대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X세대는 대략 196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개념이다. X세대에서 ‘X’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붙여졌으며 한국에서는 X세대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세대, ‘신인류’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인터넷상에서 X세대의 특징을 검색하면 타 세대에 비해 유독 독립적이고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설명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린 나이에 자급자족하는 법을 배운 ‘래치 키 키즈’이기 때문이다. 래치 키 키즈는 부모님이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스스로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의미한다. 열쇠는 보통 아이의 목에 달려 있거나 현관문 근처 어딘가에 숨겨져 있곤 했다. X세대의 부모 세대인 베이비붐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한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이 일었을 당시 출생한 세대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전후 망가진 국가 경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경제 활동에 전념했다. 여성의 학력과 사회 진출 비중이 높아지면서 맞벌이 부부가 증가했고 그 결과 래치 키 키즈가 급증했다. 대부분의 래치키 키즈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집 근처 골목이나 집안에서 서로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사교성을 기를 수 있었고, 놀이나 학습 등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스스로 선택하고 행하며 독립심을 길렀다. 부모가 아이의 여가 시간과 활동을 통 제하고 감독하는 ‘헬리콥터 키즈’와 비교할 때 래치 키 키즈는 범죄나 폭력으로 인한 부정적인 사건이 더 적었다는 미국 법무부의 조사 결과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결정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자율성을 중시하게 된 경험은 직장에서도 X세대의 큰 특징으로 작용하게 된다.
X세대의 주류를 이루는 1970년대생들은 현재 40대 중후반에 속해 있다. 직장에서 이들의 위치는 보통 중간관리자이거나 실무자 중에서도 고경력자에 속한다. 먼저, 이들의 윗세대로 자리하고 있는 기성세대와 X세대 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X세대는 지금의 MZ세대와는 사뭇 다른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는데, 현재까지 X세대의 상사로 군림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기대치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면서 그들의 권력남용에 희생된 면이 없지 않다. X세대 직장인의 대부분은 신입사원 시절 선배들의 커피 심부름, 쓰레기통 비우기 등 업무 외적인 일들을 지시받아 수행한 경험이 있다. 이는 연구 또는 설문 조사 결과를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직장 내 1970년대생들과 5분만 이야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회사 커피 타임에 그들에게 살짝 질문을 던져 보라. “선배가 신입일 때는 회사에서 커피 심부름 같은 업무 외적인 일도 시키고 그랬어요?” 그들은 신이 나서 소싯적 무용담들을 쉴 새 없이 나열해 줄 것이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그땐 그랬지.”로 끝나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당시 분위기상 당연한 일로 여겨지던 것들이 현재의 MZ세대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식되고 있어 X세대의 무용담을 들은 MZ세대는 당혹스러워한다. X세대는 ‘맡겨진 업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기한 내 완수해 내는 세대’ ‘급한 업무가 발생했을 때 갑작스럽게 야근을 요구해도 되는 세대’ ‘상사의 기분과 눈치를 챙길 줄 아는 세대’ 등 신입사원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특수한 정체성이 구축되었고 희생적 이미지가 굳어졌다. 기성세대에 의해 학습되고 오랜기간 체득된 X세대 정체성은 마치 포장지처럼 X세대를 꽁꽁 감싸고 있으며 개인 스스로 이러한 X세대 정체성에서 탈피하고자 해도 이미 체화된 말과 행동에 의해 각자가 경험해 본 적 없는 다른 정체성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또한 X세대는 정년연장 등 기성세대의 늘어난 임기로 인해 기성세대의 기대치에 부응하고 인내해야 하는 기간은 더 연장된 반면, 직장 내 경력발전이나 승진 기회는 오히려 더 축소된 면도 없지 않다.
4-청년, 중년, 노년 어디쯤
온갖 이름의 세대,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과 특징으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 2차 베이비붐세대는 어떤 기준으로 구분되었을까. 『인구 미래 공존』에서 조영태는 인구학에서 합계출산율, 출생아 수, 교육 수준 및 교육과정, 대학 진학 시의 사회적 사건, 과학기술 등을 망라해 공통으로 경험하는 삶의 궤적을 만들고 분석하여 세대를 나눈다고 설명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20여 년간 인구가 급증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을 이르는 ‘Babyboomer’라는 미국의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미국과 한국은 정치, 사회, 문화, 인구, 인종 등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구분으로 이 세대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서울대 인구학 연구실에서 한국 사회에 맞게 다시 구분하여 한국형 베이비부머 1세대와 2세대로 나누었다. 이런 분류는 인구학자 김태헌이 2010년 『연금포럼』에 게재한 「우리나라 인구 전개에서 베이비 붐세대의 의미」에서 우리나라 베이비붐 기간을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출생아 수가 급증한 1960년과 1971년 두 시점을 중심으로 전후 각 10년씩 총 20년간으로 정의하고, 이 기간 동안 합계출산율과 영아사망률에서 보이는 명확한 차이를 근거로 두 세대로 세분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당시 도시에서 자란 100만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은 ‘사람’이었다. 아내가 다니던 혜화초등학교는 한 학년 당 10반이고, 10개의 학급으로 편성했는데도 학생 수가 너무 많아 2부제 수업을했다. 한 학년당 6백 명 정도인데, 2부제 수업을 했다면 한 학년은 1천 명가량이고 전교생은 6천 명에 이른다. 말 그대로 동창이라고 해도 알지 못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_조창완, 『신중년이 온다』 중
1차 베이비붐세대는 ‘보릿고개’란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 될 정도로 혹독한 빈곤의 시기에 태어나 산업화의 역군으로 경제 부흥에 기여했다. 2차 베이비붐세대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한민국 정치 변동에 반응하고 참여했는데, 민주화의 토양이 더욱 다져지며 바로 뒤따르는 X세대가 대중문화를 마음 놓고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고 조영태는 『인구 미래 공존』에서 밝혔다. 한편 상급학교 진학률은 증가했지만 인구집단 전체에서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30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논할 때 학력과 계층, 젠더에 있어 여전히 존재한 차별과이로 인해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에 대한 논의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2001년 알렉산드라 로빈스(Alexandra Robbins)와 애비 윌너(Abby Wilner)는 『Quarter-Life Crisis (청년 위기)』에서 인간의 수명이 100세라고 할 때 생애 일사분기에 있는 20-30대 청년들이 직업, 경제, 주거, 인간관계 등 전반에 걸쳐 심리적, 정서적 불안을 겪는 것이 ‘중년의 위기(middle-life crisis)’에 비견할 만하다고 말했다. 부모와 학교,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온 청년들은 진짜 세상으로 나갈 때엔 불확실한 미래와 여의치 않은 경제 사정 때문에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를 망설이며 자신의 결정에 의구심을 갖고 불안해한다. 로빈스와 윌너는 ‘청년 위기’를 개인의 상처나 실패가 아닌 사회적으로 관심을 필요로 하는 담론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이러한 논의 이후 청년들의 문제를 소위 ‘요즘 애들의 나약함’으로 간주하지 않고 이들을 이해하고 도울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청년 위기’는 당시 미국의 청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매해 100만 명이 태어난 시기, 한국의 2차 베이비붐세대에게 치열한 경쟁은 숙명과 같았다. 죽을 둥 살 둥 공부에 매달려 좋은 대학‘만’ 가면 네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100만 세대 다수가 희망을 걸었다.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에 힘입은 3저 호황으로 고속 성장의 탄력을 받은 전 사회는 잔칫집처럼 들떠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에 성장기를 보낸 청년들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들이 정작 20-30대가 되어 인생의 황금기에 이르자 국가부도에 비견할 만한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경제 성장의 고공 행진은 조기 종료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고용시장은 얼어붙어 불황의 늪에 빠져들어 갔다. 이런 상황이니 어제까지 잘 다니던 직장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으며 졸지에 실업자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양질의 일자리는 곧 복지이고 일은 개인의 생활과 사회구조를 떠받치는 일등 공신”이거늘 IMF 외환위기로 인해 근로 능력과 의지가 충만한 청년들의 취업은 불행하게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들의 불안한 시작은 20여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2022-2027』는 설명한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송가-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얻은 불명성의 암시」에서 “유년기에는 천국이 우리 주위에 펼쳐져 있다! 자라나는 소년에게 감옥의 그늘이 덮이기 시작하지만”이라 한 것을 떠올린다. 당시에 알 수 없었을 뿐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가며 우리는 그 과정이 늘 탄탄대로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2차 베이비붐세대가 자랄 때 삶의 질, 교육 수준과 같은 환경이 이전 세대들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생각하면, 고달픈 현실만 탓하기엔 눈치를 안 볼 수도 없고 “맨날 찾아온다는 그놈의 위기타령”이란 어른들의 핀잔을 받아칠 적당한 말도 없는 형편이었다. 청년들이 젊음과 패기로 역경을 이겨내어 대한민국 경제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야 했건만, IMF 이후 심화하는 양극화와 경제적 난관에 부딪혀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며 아등바등 살다 보니 어느덧 세월은 흘러 이제 “평범한 날의 빛으로 이우는것을” 알아차리게 된 성인이 된 지도 오래다. 그뿐인가. 상대적으로 노후 준비마저 부족하니 앞으로도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5-함께 사는 세상
해외여행을 하면 박물관, 미술관, 때로는 열차 티켓을 구입할 때 시니어 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 2017년,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에서였다.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티켓 창구에 여권을 내밀며 시니어 값을 요구했다. 직원이 여권을 한번 보고는 씩 웃는다. 그러고는 우리를 보고 “You are very young!”한다. 뜬금없이 당신은 너무 젊다는 말에 어처구니없는 폭소를 터트렸다. 알고 보니 이곳은 70세부터가 시니어였다. 우리나라도 현재는 65세부터 시니어 혜택을 받지만, 머지않아 70세로 시니어 등급이 조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년 전쯤, 50살이 막 되었을 무렵 일본 여행을 갔다. 붐비는 식당에서 70세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유니폼을 입고, 20대 직원들과 같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살짝 놀랐다. 저 연세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손녀, 손자뻘 되는 직원들과 함께 부지런히 식탁을 세팅하고, 식사 후의 자리를 정리하는 할머니를 보며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일본이 급속한 노령인구 증가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노령인구가 늘면서 생산라인이 줄어들고, 소비도 하지 않아서 경제가 침체되었다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요즘 들어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2025년이 되면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된다고 한다. 70세 노인이 95세, 100세 노부모를 책임져야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비생산적인 노인 때문에 국가가 휘청거리는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이제는 노인이 대접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서서히 저출산,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 구조적으로 젊은 세대가 노인 세대를 부양하는 부담이 훨씬 커지고 있으니, 당연히 그들에게 노인 세대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June23_Topic_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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