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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0

파랑새를 찾아서

Editor.김정희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지음
보리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한다. 개츠비가 현대 문명의 화려한 불빛을 욕망했듯이. 결핍된 것을 충족한 후에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만족감이 아닌 허망감이다.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욕망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욕망의 쳇바퀴를 돌면서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에 매몰되고 만다. 삶의 주체는 누구인가. 나인가 욕망인가. 내가 ‘손수’ 이끄는 삶의 추구는 모두 그와 반대된다. 그것은 오롯한 ‘나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자 ‘나’가 주체가 되는 삶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욕망이기보다 회복에 가깝다. 어떻게 ‘나’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 것인가.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과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부부는 『조화로운 삶』을 통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삶을 이끄는 방법을 밝혔다. 그들은 노동계층이 부의 피라미드 구조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문명을 거부했다. 그들은 “일을 해서 삶의 기쁨을 키워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찾고자 했고, “허리를 굽혀 일을 함으로써 자기가 성장해 가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고자 했다. 이는 곧 내가 하는 일이 내 삶을 위한 노동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인데 현대 문명은 우리의 노동을 우리의 삶으로부터 소외시켰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요즘 ‘욜로YOLO족’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보다, 행복을 위해 현재를 ‘소비’한다. 노동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나의 노동이 나를 위한 것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허무함의 발로이지 않을까. 나의 노동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한다는 것에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니어링 부부는 1932년 미국의 시골 마을 버몬트로 이주하여 자급자족의 삶을 시작한다. 그들은 노동이 손수 내 삶을 이끄는 방안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조화로운 삶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노동이 곧 나의 정체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니어링 부부는 말한다. “평범한 도시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공구와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만족감 대신 월급이나 일당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도구와 기술을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원료를 필요한 물건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들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정신이 크게 자란다.” 이것이 우리가 잊고 있던 노동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한 경제적 도구인가.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아연해진다. 나의 삶을 위한 노동, 그 노동의 주체가 소외되지 않는 삶, 매 순간 나의 목표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나의 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곧 조화로운 삶인 듯하다. 니어링 부부는 자급자족의 노동을 통해 그들이 원한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나간다. 화학 공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농사, 자연적 퇴비를 만들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의 영양소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비건vegan의 삶을 보다 건강하게 이끈다고 생각한다. 손수 돌집을 지어 자신이 원하는 주거 공간을 마련하고, 자신의 요구에 맞는 재료를 사용하여 오래 보존되는 건물을 짓는다. 필요한 도구나 장비는 직접 만들거나 물물교환을 통해 충족한다. 어쩐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의 『오래된 미래』에 등장한 라다크의 문화와 꼭 닮아 있다. 라다크의 자급자족 전통문화에는 노동과 자연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행복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느낄 때 자존감을 얻고 성장할 수 있다. 니어링 부부는 개인의 삶에서 공동체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내가 타인에 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은 개인을 보다 존엄한 존재로 느끼게 한다. 오직 나의 삶을 바라보는 나르시스적 행위는 어쩐지 애잔하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내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고 하지 않던가. 니어링 부부는 품앗이 노동과 단풍 시럽을 만들 때 함께 이용하는 도구를 정비함으로써 공동의 질서와 규칙을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정신적인 공감대이다. 노동이 문화가 되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가 아닐까. 니어링 부부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삶은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하고, 함께 삶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조화로운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우리 삶의 최종 목표는 과연 ‘행복’일까. 소설가 김연수는 『시절일기』에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 수밖에 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그저 살아나갈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내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며. 나의 노동이 내 삶과 조화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자연과의 합일까지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요시다 겐코가 “세속적인 일에는 아무 미련이 없으나 그날그날 하늘을 보면서 느꼈던 감명 깊었던 순간들만은 마음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했듯이, 우리가 순수한 평온을 누리는 순간은 그저 일상과 자아가 합일된 순간이지 않을까. 내가 찾는 행복의 파랑새는 결국 나의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에 있다. 그것이 니어링 부부가 지향하는 조화로운 삶의 최종점일 것이라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