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20

우정의 샌드위치에서 불륜의 맛이…

Editor. 허재인

『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아르테(arte)

지극히 뻔한 스토리다. 한눈에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본격 치정 러브스토리. 여기서 안방 드라마의 단골손님이 하나 더 첨가 되었으니,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나 관객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그 때문인지, 대체 몇억 가지의 치정극이 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요즘 한창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드라마인 〈부부의 세계〉 역시 같은 맥락이지만, 오늘 소개할 책은 그보다는 조금 더 코믹하고 사랑스럽다. 책의 표지도 몽글몽글 첫사랑의 추억 같은 파스텔 색조의 분홍색이다. 나 또한 핑크빛의 표지 이미지 때문에 스무 장 정도 읽기 전까지는 평범하지만 통통 튀는 발칙한 매력의 여자 주인공과 냉철한 성격의 전문직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역시,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법칙은 위대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남의 일처럼 불끈했다가, 책의 중간 정도에서는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폭풍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내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 낯설다. 이런 내 모습. 정말이지 거울을 깨부수고 싶었다.
사실 요즘 유명한 고전 작품들을 다시 읽는 중이라, 처음에는 이 책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뼈를 깎는 고통이 느껴지는 문장을 쓰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한 작가 말이다. 어느 작가나 그러하겠지만, 유난히 독하게 단어를 고심해서 쓰는 작가들이 있다. 나는 이야기 전개보다 문장에서 깊은 관찰을 통해 얻은 삶의 철학이 느껴지는 책을 주로 구입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내 서재의 책은 대부분 거무튀튀한 색을 가지고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그 칠흑의 서재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조지 실버 George Silver의 『12월의 어느 날』이다.
전개는 심플하다. 아니, 너무 단순해서 좀 어이가 없을 정도다. 아예 독자가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본격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이다. 여자 주인공 로리와 남자 주인공인 잭이 번갈아 가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이거 완전 팝콘각이다. 내 생에 책을 읽으며 팝콘을 먹고 싶어질 줄 정말 꿈에도 몰랐다. 조지 실버는 독자가 궁금해할 순간마다 기가 막히게 시점을 바꿔 두 주인공이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가뜩이나 현대 사회에서 사회관계로 골머리 터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좋은 치유가 없다. 과연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아마존킨들Amazon Kindle’ 도서 부문 1위에 오를 만한, 아주 속 시원하게 가려운 부분을 바로바로 긁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 로리는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예쁜 친구에 대한 부러움, 본인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약간의 자격지심, 흔들리는 만원 버스에서 느끼는 짜증,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식욕에 대한 솔직한 내면의 소리까지. 정말 영국인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가 웃기고, 자연스럽다. 감히 말하지만, 내 평생 이렇게 대놓고 문장으로 웃기는 번역 소설은 처음이다. 옮긴이가 누군지 찾아볼 만큼.
나는 항상 스스로를 망한 파리지엔느로 생각했다. 할머니의 체형은 물려받았지만 우아함은 계승하지 못했으니까. 할머니의 단아한 흑갈색 올림머리는 내게 이르러 전기 오른 것처럼 정신 사나운 곱슬머리 다발로 변했다. 더욱이 내겐 댄서의 소양 따위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초콜렛 비스킷에 너무 환장한다. 내 신진대사가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이 여자, 정말이지 너무 매력적이다. 진심으로 나에게 빙의 된 줄 알았다. 세상에 저 멀리 영국 너머에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주인공이 있다니. 문체가 어떻든, 전개가 뻔하든 간에 이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강력한 이유였다. 로리는 매 순간 자신이 느끼는 생각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어이없는 건, 저 주인공의 신념이 책이 시작한 지 몇 장도 되지 않아 바로 뒤집힌다는 것이다. 그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로리는 잭과 눈이 마주치고,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로리는 몇 달간 잭을 상상하며, 본인의 성적 판타지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단짝 친구 세라가 새로 사귄 남자친구를 소개한다. 그렇다. 그 남자는 바로 잭이었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는데, 세라와 로리는 그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단짝 친구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듣도 보도 못한 샌드위치까지 발명해낸다. 이름하여 ‘DS 스페셜’. 바로 세라와 로리의 오래된 우정을 보여주는, 암호와도 같은 스페셜 샌드위치이다. DS는 대학 때 그들이 자취방 주소를 따서 딜런시 스트리트이며, 스페셜은 말 그대로 주력 메뉴에 붙이는 수식어다. 추측건대, 이 샌드위치는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식을 있는 대로 쑤셔 넣어 만든 음식으로 우연히 그 재료들이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는 바람에 그들에게 만족감을 준 듯하다.
로리는 세라에게 DS 스페셜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세라는 말한다. “너도 할 줄 알잖아.” 역시나 우리의 주인공, 로리는 세라 앞에서 나약해진다. “너처럼은 못해.” 이때 독자는 로리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왜? 세라는 너무 예쁘니까, 뭐든 다 가졌으니까. 우리 모두, 그런 잘난 친구 하나 둘쯤은 있어 봤으니까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남자로부터 상처를 못 받았을 것만 같은 그런 여자인 세세라가 홀딱 반해버린 남자친구인 잭. 만약 그 잭이 천천히 로리에게 관심을 끌게 된다면? 자, 이건 무조건 영화관 1열에서 먹는 팝콘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