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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0

투 머치의 맛

Editor.홍신익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대량’과 ‘자동’으로 자리를 잃은 소소한 손맛. 사물과 음식, 사는 집조차도 그럴듯한 재주꾼들에게 내맡긴 채 돈으로, 돈에 의해, 돈만 있으면 흔쾌히 수용당한다. 무조건 재배해 먹고 고쳐 쓰라는 말이 아니다. 망치질, 사포질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에어 프라이어에 재료를 댕강 집어넣고, 온라인 세상을 떠도는 타이핑 말고 우리의 손이 할 수 있는 더 많은 손맛을 찾아보자는 거다. 우리 엄마는 ‘투 머치too much’다. 매일 잠이 부족해 피곤해하면서도 가만히 누워 쉬지를 못한다. 요리로 보자면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은 기본이요 닭갈비, 해물 삼합, 팟타이 등 음식점에서나 볼 법한 메뉴들을 집안에서 펼쳐낸다. 레몬, 포도, 매실로 청이나 담금주를 만들고 식혜도 잊지 않는다. 생선회 뜨기는 겨우 말렸는데, 곧 누룩 냄새는 맡게 될 것 같다. 언젠가 엄마가 해본 요리 수를 세어 봤더니 백삼십여 가지가 나왔다. 맛은? 딸이지만 돈을 내야 하나 싶다. 운동으로 보자면 과거 취미로 쳤던 탁구로 메달을땄고, 몇 년간 MTB 자전거로 농로를 달렸다. 고질이 된 발 통증 때문에 등산이 힘들어져도 매일같이 산을 노래한다. 불혹의 나이엔 미니어처 만들기에 도전하기도 했다. (노안으로 백기를 들기전까지 이십여 개의 작품을 남겼다) 이뿐인가. 글과 그림, 음악, 연극, 영화까지 내가 가진 모든 예술적 감수성과 취향 역시 엄마로부터 생성됐다. 인테리어, 원예, 여행···. 말하자면 끝도 없을 영역에서 엄마의 열정은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난다. 참, 그리고 우리집에는 재봉틀(이른바 봉봉이)도 있다.
엄마의 투 머치 기질이 가장 복합적으로 발현되는 건 캠핑이다. 캠핑은 부지런해야 다닐 수 있지만, 낚시 못지않게 무료함을 즐기는 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기도 하다. 약 3년 전, 엄마의 열렬한 바람으로 첫 캠핑을 떠났다. 웬만하면 크고 좋은 걸 사고, 뭐가 됐든 일단은 챙겨가 보는 우리 가족은 SUV 차량에 겨우 몸 들이밀 공간만 남길 만큼의 짐을 꾸린다. 매번 이사를 하는 건지 캠핑을 가는 건지 모를 정도다. 텅 빈 파쇄석이나 덱deck 위에 우리만의 막사 하나 만들어 놓고 앉아서, 누워서, 눈으로, 귀로 자연에 가닿는 자급자족 생활. 해 질 무렵 화로대에 나무토막을 쌓아불멍(장작불을 보며 멍하게 있기)을 할 때면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벽에 못 박을 때 말고는 본 적 없던 망치, 전기밥솥의 출현 이후 딱히 해먹을 일 없던 냄비 밥도 캠핑장에선 예사다. 자고 먹고 씻는 것, 추위와 더위까지도 직접 맞닥뜨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불만은 통하지 않는다. 그저 팩peg을 다시 박고 그늘의 방향대로 의자를 이동하는 수밖에. 텐트를 치고 걷고 살림살이를 늘어놓고 정리하고…. 캠핑의 과정은 무(無)에서 유(有)로, 또 그 반대로 다시 가는 쓸모 있고 즐거운 뻘짓임에 틀림없다. 정직한 불편함. 그것만으로도 캠핑은 충분히 가치 있다. 역시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얼마 전, 쓴 지 2년 정도 된 수동 커피 머신이 고장났다. 그래도 몇 달 전엔 저절로 다시 작동하더니 이번엔 아예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다. 혹시나 하고 작동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파르르 떨며 화부터 낸다. 느림의 미학으로 내려 마신 지 일주일째 접어들면서, 어차피 유상 수리일 텐데 더 미루지 말고 A/S센터에 전화하리라 마음먹었다.
현관문 앞에 웬 커다란 박스가 있다. 주말에도 택배가? 대단한 세상이다. 다소 과대 포장된 박스 안에 들어 있던 건 노랗고 검은 공구함으로, 박스의 주인은 대학생인 동생이다. 어릴 때부터 조립과 수리에 흥미를 갖던 동생은 엄마와 둘이서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고치고, 옮기고, 손보는 걸 즐겨 했다. 손재주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공구에 관심을 두고 모으기 시작하더니 결국 공구함까지 들여왔다. 된장은 안 담가도 그 야무진 손에 뭔가는 만들어질 것 같다. 아, 그전에 커피 머신고쳐볼 생각은 없는지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