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나의 조지프 할아버지

에디터. 전지윤 자료제공. 클

“2007년 여름, 한낮. 이스트런던의 내 사진 스튜디오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가 있었다. (…) 천천히 발을 끌며 혹스턴 광장으로 걸어가서는, 네온 색 옷을 입고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는 젊은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나는 카메라를 들고 얼른 내려갔다. 그의 사진을 찍으면 공모전에 낼 수 있겠다는 심산으로. (…) 나는 그가 광장에 서 있는 사진을 찍었다. 좋은 컷은 아니었다. 그는 나무토막처럼 경직되어서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걸로는 공모전에서 절대로 상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프 마코비치였다.”
책 표지 속 노신사와 눈을 맞추다 보니, 그를 런던 혹스턴거리 어딘가에서 직접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플라스틱 안경 너머의 눈이 무척 생기 있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뭐라 말을 할 것만 같은 입, 앞장서 걷다가 잘 따라오는지 뒤돌아볼 것 같은 표정도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해 그의 면면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보기 시작했다. 외출할 땐 늘 블레이저를 입을 테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지만 의외로 깔끔할 것이다. 매일 비슷한 루트를 산책하는 그는 어쩌다 나 같은 아시아 여자를 길에서 마주치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막상 인사를 하면 반갑게 화답할 것 같다. 어쨌든 그는 그저 그런 노인은 아니어 보인다. 자자, 이런 식의 상상 속 만남도 반갑고 즐거웠지만 이제 진짜 책의 페이지를 넘겨 사진의 주인공, 조지프 마코비치Joseph Markovitch 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차례다.
책을 여는 글은 조지프 자신이 아니라, 그의 사진을 찍은 젊은 친구 마틴 어스본Martin Usborne이 쓴 것이다. 마틴은 조지프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당시 그가 느리지만 숨도 안 쉬면서 액션 영화나 배우에서부터 질환, 과학기술의 위험성 등 온갖 화두를 넘나들며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책에 수록된 조지프의 말들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학식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조지프를 마틴은 폄하하거나 우습게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열정적으로 하는지 모르지만, 마틴은 조지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피사체를 담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정도보다 훨씬 깊은 경청이 사진에 담겨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세대를 뛰어넘은 우정과 존중을 본다.
“나는 완벽한 컷을 찾기보다 조지프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더 좋은 사진을 찍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아주 개인적인 어떤 것을 발견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조지프의 사진 속에는 내 외로움의 일부가 들어 있다. 나는 그때 싱글이었고, 도움이 될 인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좋은 초상 사진은 언제나 두 사람을 포착한다. 사진 찍히는 사람과 사진 찍는 사람.”
조지프는 영국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스트런던을 떠난 것도 어머니를 따라 해변에 갔던 딱 한 번이 전부다. 그는 늙고 허약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심오하고 광활한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 조지프와 친구가 되는 데에는 그의 외양이나 나이, 배경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릴 적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상하면서도 그들에게 악의는 없었을 거라 말하고, 젊은이들이 남기는 그래피티는 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얼마든지 해도 좋다는 조지프. 그는 한편 예의 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고심하기도 한다. 가난은 서로를 돕고 살지 않는 이유가 되지 않으며, 세계화가 된 만큼 현대에는 서로 침략하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힘을 합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도 여간 걱정이다. 조지프는 평생을 노동자 계층으로 살았던 외로운 노인이지만 세상에 대한 포용적 태도와 매너는 훌륭했고, 활기가 넘쳤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도 엄마는 불편을 감수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낸다. 아이들은 오직 한 사람, 엄마에게 의지하고 있다. 옷과 피부를 잡아당기는 작은 손, 세심한 배려와 포근한 손길에 안긴 아기의 보드라운 살결 등 익숙한 아름다움과 아늑함을 담은 이미지들은 그것이 엄마들의 마땅한 행복이자 희생이라 말하는 듯하다. 여성이 엄마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만들어왔던 삶과 정체성은 그렇게 서서히 잠식 당한다.
“현대에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해요. (…) 우리한테 모든 게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 자신을 침략했겠지요. (…) 만약 내가 정글에 갔다면, 그런데 내가 똑똑했다면, 선교사가 돼서 남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여긴 정글이 아니니까, 대신 도서관에 갑니다.”
젊은 예술가 마틴 어스본은 조지프를 만나기 전, 나이 듦이란 “지쳐버린 배우가 무대 뒤로 물러나다가 마침내 발을 헛디디는 것처럼, 어둠 속으로 서서히 뒷걸음질 치는 것”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틴은 조지프에게서 낯선 사람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열린 마음, 타인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 새로움을 향한 호기심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이 반드시 상상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으므로, “살 수 있는 동안 살라”는 유쾌하고도 뭉클한 지혜를 얻는다. 만약 마틴이 그와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지 않고 공모전에서 상을 탈 만한 완벽한 사진을 찍는 데에만 몰두했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혜안이었다.
유대인이지만 맛있는 샌드위치가 있는 개신교 교회에도 자주 나갔던 조지프 마코비치.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여든일곱 번째 생일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이제 혹스턴 그 어디에도 조지프는 없다. 그가 영영 떠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틴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그리워한다. 먼 은하계에서 온 것처럼 특이하고, 친절함과 순진무구함을 장착한, 헐렁한 양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조지프를 마틴은 이스트런던 곳곳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에 담았다. 그렇게 영원히, 두고두고, 조용했지만 풍요로운 인생을 살다간 친구를 기억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앤서니라는 조지프의 조카를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나에게 열여섯 살 조지프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나는 이 사진이 참 좋다. 그 두 눈에 그의 한평생이 보인다. 아마도 그 표정이 70년이 흐른 뒤에 내가 본 표정과 거의 똑같아서 일 것이다.”
April22_Inside-Chaeg_01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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