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모든 우정

에디터. 지은경 자료제공. 사계절

토그저 예쁜 색채에 약간의 기발함을 가미한 그림책이려니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 책을 다 읽는데 걸린 시간은 딱 15분. 그런데 여느 15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셀러리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15분은 금세 잊혔지만, 이 책을 손에 든 순간부터 15분간 흐른 시간은 마음 서랍 안에 고이 간직한 채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나는 조금 낯간지럽지만 진심으로 책을 껴안았다. 그리고 이 책은 내 서가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책만큼이나 더없이 소중한 보물들을 하나 둘 떠올리며, 가장 좋은 자리에 놓였다.
“모든 우정은 잠시 지나가든, 평생 이어지든, 애정으로 변하든, 불신으로 끝나든, 구할 가치가 있다”라는 문장이 책의 끄트머리에 쓰여 있다. 이 문장이 뭐라고 갑자기 울컥했을까? 그동안 내 삶에 머물다 사라진, 그리고 지금 현재 머물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 헤어졌다 우연히 다시 만난 친구,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 친구의 지인으로 만났던 친구, 일로 만난 친구, 최근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 각양각색 친구들이 모두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둥글둥글해진 성격 탓일까? 아니면 그동안 나를 지나친 모든 만남과 인연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일까?
전혀 관계없이 살아온, 모르던 사이의 타인이 서로 친구가 된다. 수많은 별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마치 그때의 상황과 장소, 시간이 점지해주듯 친구가 된다. 그리고 온갖 시간을 함께 나눈다. 즐겁고, 평화롭고 신나는 순간에 피어 나는 우정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영원할 거라 믿고, 참된 관계라 여긴다. 그러나 변치 않을 것만 같던 우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감정에 따라 가지각색의 표정을 드러낸다. 실망, 의심, 권태 등 우정을 흔들어 놓는 숱한 위기를 거치면서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후에도 셀 수 없이 여러번, 또다시 부딪히고 극복하기를 반복한다. 수많은 오해와 이해와 대화가 쌓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멀어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우정 그림책』을 펼치면 두 페이지마다 간결한 글과 그림이 이어진다. 문장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 어떤 길고 긴 서사보다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고 유머스러우면서도 가슴 찡한 구석이 있다. 문장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지는 그림들은 때론 기묘한 방식으로 위로와 통찰을 안긴다. 주거니 받거니, 핑퐁 게임하듯 우정에 대해 말하는 글과 그림은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섬세한 감정선으로 깊은 공감대를 만들기도 한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는 유독 한 얼굴을 떠올리고, 지금은 관계가 끊어진 누군가가 스치다가, “그래, 그때는 우리 어쩔 수 없었잖아”라며 다친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소중한 친구를 더욱 소중히 여기기로 다짐한다.
책을 쓴 하이케 팔러Heike Faller 작가는 최근 손님용 매트리스를 샀다고 한다. 더 이상 친구들이 소파에서 잠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발레리오 비달리Valerio Vidali는 친구의 전화나 이메일에 며칠 동안 답을 못하고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아주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어 번역은 동화작가이자 평론가,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는 김서정이 맡았다. 그는 이미 친구들을 위한 손님용 매트리스도 갖추고 있고, 전화와 이메일에 꼬박꼬박 답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소개팅남은 제외라고 말한다. 우정에 관한 책을 엮은 이들이 말하는 우정은 제법 유쾌하다. 이 또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만큼이나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정을 보여주는 책의 면모를 한껏 높여주는 요소다.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친구들이 있지는 않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관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책은 모든 우정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관통한다. 우두커니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던 순간, 열띠게 토론하던 순간, 질투하고 거리를 두던 순간, 다시 만난 순간… 친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사소하지만 다채로운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책의 그 어느 곳에도 과장이나 근사한 포장은 없다. 친구가 되어 우정을 이어가며 있을 법한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놓았을 뿐이다.
돌이켜보니 우리의 수많은 만남은 우정이 되었다. 그 우정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잊고 살았다. 내 삶을 지탱하는 이야기가 되고, 세월이 되어준 모든 인연들에게 모처럼 안부 인사를 전해보려 한다.
April22_Inside-Chaeg_02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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