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 2019

나의 유산

Editor. 김선주

읽고 싶은 책은 날로 늘어가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독자.
작은 책방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책들을 수집 중.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지음
좋은여름

아들을 바란 집에서 딸로 태어나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 아무렇게나 ‘화정’이라고 이름 지어졌지만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좋은 여름’이라는 뜻의 ‘하정’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된 아이는 어영부영 자라 남들과 똑같이 어른이 되어 회사도 다니고 관계 속에서 실패를 겪기도 하는 평범한 나날들을 통과한다. 서서히 지쳐가던 무렵, 저자 ‘썸머’는 우연히 발길을 돌린 덴마크에서 앞으로의 인생을 변화시킬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경험한다. 덴마크에서 독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만난 덴마크 여인 쥴리. 그녀에 대한 왠지 모를 끌림에 모든 일정을 바꿔 덴마크로 돌아와 그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 한 달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기록하는 포토북 프로젝트를 위해 다시 덴마크를 찾는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는 그 결과물이다.
제목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듯, 썸머를 그 먼 땅으로 다시 데려다 놓은 것은 바로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인 할머니 아네뜨다. 은발에 빨간 모자가 잘 어울리는 귀여운 미소의 아네뜨는 쥴리의 어머니이자 쥬얼리 디자이너다. 그녀는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뜨개질하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유럽 할머니이자, 예술가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과 가족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소박하고 다정한 여인이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손길이 닿은 집안 곳곳에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썸머는 그런 가구와 물건들의 내력을 아네뜨와 가족들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사진과 글로 모으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그의 향을 흡수하는 일이다. 그가 사용하던 숟가락, 접시, 침대보를 내가 쓴다. 치약이나 샴푸, 세탁세제 따위도 얻어 쓴다. 그가 밑줄 그은 책을 읽고 그의 체형대로 모양이 잡힌 옷을 빌려 입는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에게서 나는 향이 같아진다.
아네뜨는 오래됐지만 반짝이는 물건의 가치를 알고 그 속에 담긴 이전 사람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한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을 자신이, 또 그녀의 딸들이 세대를 거쳐 알뜰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녀가 쓰는 가구와 접시, 옷 등에는 그들의 부모님이 있고 또 지금의 가족이 있다. 대대로 물려받는 가구와 물건들은 그저 창고에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과 이야기를 더하며 쓰임을 다할 때까지, 혹은 다른 이에게 전달될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된다. 자신에게 애착 있던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서 또 다른 애착을 낳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가족의 유산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준다. 돌아간 아버지의 하나뿐인 물건이나 시간을 들여 직접 만든 물건을 기꺼이 선물하는 모습은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물건들을 통해 한 가족이 여러 대에 걸쳐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배우는 한 달의 시간은 저자에게도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태어난 곳에서 받은 것이 없기에 물려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덴마크의 할머니가 알려준 이토록 다정하고 아름다운 유산은 작은 것 하나라도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무엇을 만들지는 어떻게 살지를 말한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무엇을 남길지를 말한다.
아네뜨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오래된 것을 소중히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끈기 있게 지속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정원에서, 온실에서, 거실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뜨개질을 하고, 자신의 일을 할 땐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모습은 읽는 이에게도 묘한 다짐을 불러일으킨다.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삶을 밀고 나간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저자는 아네뜨의 일상에 녹아들면서 어느새 어른이 되며 잊어버렸던 놀이들을 하나둘 찾아간다. 형형색색의 오래된 옷걸이들을 펼쳐놓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빈티지 마켓에서 가치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자유롭게 헤매기도 한다. 쓸데없어 보이는 일들을 멋지다며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그녀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고 놀 수 있게 된다. 아네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일을 수고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주변의 평범한 일상에서 소박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게 된다.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이 책을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어떻게 살고 싶은지 한 번쯤 그려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덴마크의 어느 귀여운 할머니가 ‘그거 굉장히 멋진 일인데!’ 하고 아낌없이 칭찬해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