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20

이것도 옳고 것도 옳다면

글.김복희

시인. 밤 사이 새로 심긴 길가의 꽃들이 너무 신기하다. 언젠가 꼭 조경하는 걸 몰래 구경하고 싶다.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가 있다.


『“그치만 엄마, 배꼽티는 진짜 예쁘잖아요!”』
샐리 해스랭어 지음
김해연 옮김
전기가오리

분명 ‘서양 철학의 논문들’이라는 총서에 포함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책 제목이 영 논문 같지 않아 보였다. 무릇 논문이란, ‘○○○○에 대한 고찰’이라든가 ‘○○의 ○○적 ’ ‘○○론’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나? 나는 “But Mom, Crop-tops Are Cute!”라는 제목을 보고, 논문이란 무엇인가? 하는 상념 아닌 상념에 빠져들었고, 이것도 일종의 논문에 대한 오해나 환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살아온 배경(한국에서의 국문학 교육과정)이 ‘논문’이라는 것에 대해 나의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이 또 내 삶의 궤적을 지금까지와 같은 지난한 방식으로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중에 만난 이 책, 중1 여자아이와 부모 간의 대화 중 일부를 제목으로 차용한 『“그치만 엄마, 배꼽티는 진짜 예쁘잖아요!”』
는 논문에 대한 나의 Illusion을 조금 물렁물렁하게 만들어주었다.
먼저 첫 장을 펼치면 “사회적 지식, 사회구조,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소제목과 소절 “서론/배꼽티는 예쁜가?/‘믿어야 한다’/사회적 현실/사회적 진리/비판/결론”을 보자니, 배꼽티에 대한 대화를 예시로 상충하는 사회적 지식이 있을때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 좋았다. 사실, 모종의 사회적 환경에서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데에는 분명히 객관적 근거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무작정 이데올로기를 깨부수자,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 주장하는 것은 근거 부족으로 비칠 뿐이다. 하지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뭔가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대관절 배꼽티가 뭐길래? 요새는 ‘크롭탑’으로 더 많이 말하곤 하는, 유아복같이 작지만 엄연히 성인용인 옷을 보며 나는 첫눈에 일단,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호감이 옳지 않다는 생각도 동시에 해야 했다. 성인 여성이 저렇게 어린애(처럼 보이는) 옷을 입는 것은 도착적인 것이 아닌가, 성에 무지하지만 성적으로 소비 될 수 있는 무력한 존재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는 성인이 아니라 청소년이 그런 젠더 수행 기능이 두드러지는 옷을 입고 싶어한다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설마 나는 어린애라면 저런 옷을 입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저옷이 예쁘다고 생각하고 말았던 걸까? 왜 비판을 다 감수하고서라도 아직도 저 옷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끝이 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답은 하나도 못 했다. 다만, 크롭탑 하나로도 나 자신을 취조하듯 탈탈 털어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취향이란 상대적이라고, 어쩌면 개인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주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취향, 즉 단독의 무언가는 세상에 없다. 비단 나만의 문제, 크롭탑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상을 향한 호오가 젠더 교육을 통해 나도 모르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심을 품은 채로도 내가 어떤 취향에 이끌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감탄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다. 충돌과 혼란이다. 한 사람의 여성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늘 품고 있는 고충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면, 우리가 혹은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도 선택할 수 없고 그냥 다 옳다 하고 좋은 게좋지 이러면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야말로 옳지가 않다.
대강 말하자면, 이 책은 사회적 지식과 그 사회 세계 내 사유와 현실 간 상호의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신도 죽었다는 마당에 절대적인 진리 운운하는 것이 좀 머쓱하기는 하다. 인식론 측면에서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은 이제 새로울 것이 없는 진리다. 그러나 인간은 대개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따르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구조 및 실천을 수행한다. 뭐랄까, 인간은 믿음의 구조 안에서 살아간다.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은연중에 믿음에서 비롯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데, 그 행동이 다시 믿음을 강화한달까. 믿음은 다양하고, 그렇다 보니 다중의 사회 세계 내지 환경이 존재하기에 인간사가 이렇게 피곤하고 복잡하고 난처하다는 한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만 말하고 멈출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결론의 한 구절을 빌린다. “비판은 변화하는 믿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지배적인 도식을 와해하는 사회적 공간을 창출하는 문제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지만, 여기서 저것은 옳지 않고 저기서 이것을 옳지 않다는 말도 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