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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0

십이월

글. 이주란

소설가. 아직까진 잘 웃고 잘 운다.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있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수오서재

내가 모지스 할머니를 알게 된 것은 내 오랜 친구 J 덕분이었다. 우리는 나의 작은 방에 마주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J는 내게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들을 보여주며 이 문단을 들려주었다.
“메이플 시럽 파티는 내 다음 세대에 생겨난 것이라 가보진 못했네요. 저 위쪽 버몬트주에선 그게 오랜 풍습이었다지요. 아이들은 그릇에 소복이 눈을 담아 설탕으로 변하기 적전의 시럽을 부은 다음 제각기 사탕을 만들어 먹었어요. 그렇게 실컷 먹었으니 아마 그날 밤엔 달콤한 꿈을 꾸었을 거예요.”
J가 말했다. “특히 겨울을 그린 그림들이 좋아.” 나는 J가 아마도 아델 아주머니를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J는 어느 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일랜드로 떠났다. 그리고 거기서 아델 아주머니(당시 70대셨지만, 한국 친구들에게 설명할 때는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의 집에 살았다. J가 종종 들려주던 아델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은 할머니가 없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부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J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전기장판을 미리 켜 놓아준다든가 좋은 곳을 발견하면 다음에 같이 가서 시간을 보낸다든가 하는).
J가 집으로 돌아고 나는 모지스 할머니의 책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를 구입해 읽었다. 모지스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나 그 후의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할머니가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것이 76세이기 때문이다. 털실로 수를 놓는 그림을 종종 그리다 만성 류머티즘으로 더 이상 바늘을 사용할 수 없어 붓을 들게 된 것이 그 계기.
종종 인터넷에서 이런 글들을 보게 된다. “서른이면 늦은 거 아님. 우리 엄마는 55세에 를 시작해서 58세에… ” “삼십대 중반이면 늦은 거 아님. 우리 사장님은 62세에 를 시작해서 지금…” “마흔이면 정말 늦은 거 아님. 아빠 친구 분은 67세에 ○○를 시작해서… 지금 정말 행복하심.” 등등.
언젠가부터 종종 조급함이 밀려왔다. 느긋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욕심부리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괴로워졌다. TV에서는 언제나 극과 극의 이야기들이 오가 혼란스러웠지만,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 이상 언제든 깰 수 있는 관념들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6살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천천히 하세요. 때로 삶이 재촉하더라도 서두르지 마세요. 사람들은 늘 ‘너무 늦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12월이다. 책의 194쪽에 실린 「12월」이라는 그림 속의 많은 사람들은 각자 얼음 위를 달리고 있거나 아이를 돌보고 있거나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거나 양을 몰고 있거나 장작을 패고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좋아하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미래의 ‘지금’에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