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20

너는 내 여행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난다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섰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생각의 편린들이 떨어져 쌓여가는 동안 잊고 있던 겨울이 다가왔다. 가을을 충분히 만끽한 끝에 맞이하는 추위는 또 그저 자연스럽고 반갑기까지 하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 할 준비가 된 것이다. 따뜻한 실내에서 폭신한 담요를 덮고 귤 까먹으며 독서하는 즐거움, 흰 눈과 함께 연상되는 붉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상상하며 올해의 고마운 얼굴들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들썩인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때, 로맨틱한 소설책 한 권 손에 쥐
고 싶어진다.
사랑보다 더한 환상이 어디 있을까. 사랑은 어쩌면 피치 못할 이별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환상을 지속할 수 있으니까. 그런 냉소를 비웃으며 여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외계인과의 특별한 사랑을 소개한다. 잔잔한 러브스토리로 보이지만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이 사랑의 판타지는 스펙터클 급이다. 국민성으로나 과학성으로나 여러모로 지구보다 훨씬 발달한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경제 능력까지 갖췄다. (연필심을 씹어 먹고 다이아몬드로 뱉어낸다면 말 다 했지. 각종 선진기술로 특허받아 생활하는 것은 또 어떻고!) 지구인과 생체의 시간이 달라 늙지 않는 외모에 사랑을 지키는 마음마저 겸비했다. 더군다나 죽어서도 함께 하는 사랑까지 가능하게 하는 순애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이 무한한 사랑 이야기에는 인류, 환경, 사랑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방향성이 총망라된 느낌이다. 연애 소설인 줄 알고 읽다가 책을 덮고 나면 대서사시의 요약본을 읽은 듯한 느낌이랄까. 문득 디즈니 동화 ‘단추로 끓인 수프’가 생각난다. 인색한 도널드는 단추 하나로 맛있는 수프를 끓일 기대감에 차 있지만, 지혜로운 데이지는 단추를 필두로 각종 다양한 야채들을 도널드가 직접 가져와 넣게 만든다. 그렇게 도무지 맛있지 않을 수 없는 수프가 완성된다. 한아와 외계인 경민의 사랑도 그렇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차근차근 우주적 세계를 완성해 간다. 한아로 말할 것 같으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는 개체는 없다는”것을 “선험적 이해”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구인이다. 그런 한아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외계인 경민은 자가 증식으로 온 개체가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행성에서 온, 선량한 마음을 타고난 존재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치게 ‘컴포트 존comfort zone’이라는 이유로 자기 행성은 언젠가 사람들이 모두 떠나 무인 행성이 되리라 전망한다. 마음이 어딘가에 닿지 않는 평화의 공허, 우리의 존재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은 결국 ‘무엇’에, 그리고 ‘누구’에게 가닿는 사랑이라는 점을 꼬집는 지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아는 자기 일을 두고 ‘단순히 오래된 옷의 생명을 연장하고, 환경 보존의 차원을 넘어 개인의 기억과 공동체 문화에 닿아 있는 직업이라는 자부심’을 느낀다. 한아와 외계인 경민은 삶의 영역을 개인에서 공동체로 확대해 나간다. 청소년을 위한 장학 사업, 리사이클 사업, 일자리 창출, 동물 착취를 거부하는 삶이 그들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네 문제에 대한 절대적 해결 방안을 모두 모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를 스쳐가는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존재는 없다고 여기는 삶이 와 닿는다. 그 누구의 마음도 허투루 다루지 않으려는 섬세한 의지가 느껴진다. 결국 온갖 종류의 환상은 인간 살이에 있고, 그 정점에 사랑이 있다. “네가 내 여행이잖아”라는 말을 듣는다면 대상이 외계인이라 해도 한아처럼 설레겠다. 그 외계인이 오색찬란한 광물 빛을 품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광년의 거리를 넘어왔다면 더더욱. 사랑의 판타지를 완성해주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겪는 공감과 대리만족은 언제나 즐겁다. 몽실몽실한 구름만 봐도 마음이 간질거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싶을 때는 이런 책이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