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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16

가을의 전설이여, 역사적 사건으로 막을 내리라

Editor. 에디터 한진우(메디치미디어 편집자)

메디치미디어 편집부에서 근무 중. 취미는 사무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청와대 지붕을 보며 불순한 상상을 하는 것.
국정원이 싫어할 책을 출간했으나 몇십 권 사가고는 절대시계 하나 보내오지 않아 좌절 중이다.

『장기보수시대』 신기주 지음
마티

2016년 가을은 몰락의 전설이다. 한국인에게 가해진 첫 번째 충격은 최순실 게이트였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이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었다. 부정입학이나 몇억 수준의 횡령·사기·뇌물은 뉴스거리도 못 된다.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곳에 저 그림자 정부의 오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합법적 민주제도를 통해 집권한 이들이 한국을 문자 그대로 헬조선으로 만들었다.
한국인에게 가해진 두 번째 충격은 ‘훌륭한 사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이다. 밉상의 아이콘과 희대의 ‘돌아이’의 대결이었던 미국 대선에서 ‘돌아이’, 아니 트럼프가 이겼다. 이제 우리는 머리 위에 핵 성애자 김정은, 그 위에 방사능 홍차 애호가 푸틴, 아래에 극동 아시아의 나치 아베, 바다 건너로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트럼프가 버티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한국의 5070세대와 빈곤층은 평생 노동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박근혜를 뽑고, 미국의 5070과 빈곤층은 가난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투표가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정체성이 우선된다 하더라도 빈자보다 부자를, 노년 복지보다 기업 성장을 우선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는 행위가 정신착란보다 나을 게 뭐가 있겠는가.
이때 우리가 읽어봄직한 책이 바로 『장기보수시대』. 저자는 신기주 경영 전문 기자다.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버그를 낳는다’는 장이다. 승리자 엘 고어 대통령은 왜 그리 섣불리 패배를 인정했을까? 같은 맥락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의원은 재검표를 하지 않고 어째서 대선 패배를 받아들였을까? 이 모두 정치적 승리보다 정부 통치력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중요시한 정부 통치력은 대국민담화에서 “그래도 국정운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야를 거부한 박근혜의 불통 발언과 단 1㎎도 관계가 없다. 처음부터 박근혜는 국정운영이란 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1월 5일, 20만 개의 촛불이 광화문을 환하게 밝혔다. 이 촛불은 상당수 박근혜 하야를 위한 것이지만, 실종된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를 향한 귀환 명령이기도 했다. 촛불집회를 두고 저자는 ‘통치를 의뢰했던 시민사회가 국가에 계약을 존중하며 이행을 촉구한다는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나아가 시민사회의 의뢰 내역이 통치에서 통솔로 변화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최순실이 범행을 부인하고, 우병우가 ‘황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저들에게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
‘선거는 시민의 뜻을 반영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부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해 행해진다’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대선 TV토론에서 참패했고, 도덕성에 흠이 크며, 정치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언사를 일삼던 박근혜-트럼프가 투표에서 이겼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와 그 수단으로서의 민주제도 자체에 심각하되 대체할 길이 당장은 없는 ‘버그’가 있다는 해석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듯 민주제도는 시민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며, 선거는 왜곡된 민의로 귀결된다.
한국은 버그에 저항해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는 언론을 장악해 촛불을 무력화시켰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그 언론이 촛불에 불을 붙였다.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민주주의의 위기 나아가 종말이 거론되고 있다. 서유럽의 시민사회에서는 ‘60세 이상은 미래 세대가 아니므로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격한 토론이 오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는 곧 파시즘이지만, 그만큼 청년세대는 노년세대의 잘못된 선택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믿는다.
미국, 아니 세계라는 이름의 열차가 진입할 이 터널이 얼마나 어둡고 길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은 그 열차의 ‘꼬리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장으로 가야 한다. 한때는 역사가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 올가을의 끝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당당하게 귀환하기를, 촛불 하나를 켜고서 간절히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