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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7

짠내를 풍기며 오늘도 살아갑니다

Editor. 박소정

불안한 표정이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고양이를 보면 일단 ‘야옹’ 하고 인사부터 하는 고양이 덕후.
귀가 발달한 편이라 소음을 피하기 위해 항상 BGM을 틀어놓는다.

『혼자를 기르는 법1』 김정연 글·그림
창비

‘멀었다.’ 혼자 자취를 시작하며 산 작은 전기밥솥 수명이 거의 다 됐을 정도로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혼자 산다는 건 새로운 사건의 연속으로 여전히 힘들다. 고수(?)의 길에 오르려면 아직도 멀었다. 고수가 산 정상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다면 나는 지금 중턱도 못 올라와 후회하며 온 길을 돌아보고 있는 꼴일 것이다. ‘내가 어쩌자고 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까’ 속으로 생각하며. 그래도 쓰린 가슴을 토닥이며 한밤중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술을 한 잔 홀짝이며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자유’ 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위로를 받는다.
『혼자를 기르는 법』을 통해 ‘시다’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지난 2015년 12월부터 다음 웹툰을 통해 선보이기 시작한 ‘혼자를 기르는 법’ 은 점점 입소문을 타며 올해 2월 창비에서 단행본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이시다’ 아무렇게나 막 지은 것 같지만 사실 ‘이름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는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아버지가 고민 끝에 ‘훌륭한 분 이시다’와 같이 귀한 대접을 받을 것만 같은 이름을 지어주게 된 사연에는 자신처럼 무시당하지 말고 살라는 사연이 들어있다.
그런데 본래 의도와 달리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이 시대의 ‘시다’로 살아가게 된다. 홀로 서울에 살며 작은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는 그녀는 사무실 한 켠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리며 복사와 비품 찾기, 서류 보내기와 같은 일을 하고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이 시대의 진정한 시다바.., 아니 일꾼으로 성장해 나간다. 회사에서 자기보다 높은 연배의 남자 상사들과 일하는 그녀는 갑갑할 때면 잠시 회사 밖으로 나가 얼굴처럼 생긴 것을 찾아 말을 건네는 습성이 있다. 대화 상대는 소화전부터 자동차까지 대중없지만,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는 “너도 이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먹고산다는 것은..”과 같이 하나같이 짠내를 풍긴다. 한번은 공사장의 포크레인에게 말을 걸려다 그의 등에 붙어있는 ‘1일 작업 8시간 정착’ 글귀를 보고 그만 할 말을 잃는다. “오늘도 중장비보다 오래 일했습니다”라고 덧붙이는 그녀의 이야기에 이 시대의 노동자들도 할 말을 잃는다.
“뭔가를 단단히 배운 느낌이었지만 그 새끼들은 정말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겠죠.
그렇게 자정을 넘긴 딸들만이 서울을 알아갑니다.”

많은 이들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혼자’ 사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걸 으레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여자’라는 옵션을 더한다면 삶의 난이도는 훌쩍 상승해 ‘위험’ 단계에 다다르기도 한다. 시다도 위험군에서 예외가 아니다. 어느 날 자정을 넘어 집에 들어가던 시다는 골목길에서 낯선 남자들을 접한다. 잠시 담뱃불 좀 빌리자고 가까이 다가온 그들에게 그녀는 별 생각 없이 호의를 베풀지만 그들은 호의를 ‘Yes’라고 받아들이기라도 했는지 악마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시다는 다행히 골목을 뛰쳐나와 위기를 면했지만 이후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녀의 소식을 들은 주변 이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지만 ‘거봐’와 ‘원래’를 시작으로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로 결론 내리며 공허한 위로를 건넨다.
먹고사니즘에 허덕이고 위험한 순간에 자신을 구하며 혼자를 기르며 살아나가는 시다지만 혼자만의 삶을 마음껏 누리기도 한다. 집에 들어가면 팝업창처럼 튀어 오르는 가족들의 오지랖과 잔소리에서 해방되어 조용함을 만끽하고, 비싼 비누를 사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쓰는 등 소소한 사치도 부려본다. 또한 우연히 키우게 된 골든 햄스터에게 ‘윤발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여 우정을 나눈다. 윤발이의 집을 계속 업그레이드 해주기도 하고 퇴근 뒤 윤발이에게 하루의 일과를 들려주며 누구에게도 할 수 없던 말을 전하기도 한다. 물론 독립성 강한 햄스터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 한밤중에 ‘우두두두’ 쳇바퀴 굴리는 소리로 잠을 깨우기도 한다. 하지만 시다는 속이 깊은 건지 엉뚱한 건지 ‘주먹만 한 주제에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감탄하며, 자신 또한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지만 생산적인 것이라곤 얻지 못하는 모습에 동질감을 표하기도 한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여섯 컷 안에 단색으로 단순한 그림과 짧은 글이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얻는 생각들과 고민은 결코 단순하지도, 짧지도 않다. 책은 가족의 품을 벗어나 ‘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부터 생존의 조건,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 타인을 넘어 다른 생명체의 세계까지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때문에 꼭 혼자 살지 않더라도 여자가 아닐지라도 ‘시다’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볼 가치가 있다. 속 깊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살면서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갈 일상의 순간을 보다 소중하게 다시 들여다 볼 시간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