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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7

쓸모와 필요

Editor. 김지영

요즘 들어 사촌 오빠들이 하나둘 탈모 클리닉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웃프’다.
어제저녁에는 탈모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아빠를 보면서 올가을엔 꼭 가발을 맞춰드리리라 결심한 효녀.
그런데, 내 통장도 탈모인가 싶다. 텅텅! 비었다.

『하루 100엔 보관가게』 오야마 준코 지음
예담

새해에 다이어트를 다짐하고 체육관을 다녔지만 3주 만에 운동을 그만뒀다. 퇴근 후 바로 운동을 가야 했기에 체육관에서 제공하는 사물함에 물건을 맡겼는데, 운동을 그만둔 후 맡긴 물건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체육관에 두고 온 세면도구를 버려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다. 체육관을 다니지 않기로 하고 일주일은 ‘오늘 저녁에 퇴근하면서 꼭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다음 일주일은 ‘혹시 버리지 않았을까?’ 걱정했고, 그다음 일주일은 ‘이미 버렸을 거야’하고 결론을 내렸다. 결론을 내렸음에도 맡긴 물건이 계속 떠올랐다. 오야마 준코의 『하루 100엔 보관가게』를 읽게 된 것도 찝찝한 마음에서였다.
이 책은 도쿄 근교의 한 상점가 끄트머리에 위치한 ‘보관가게’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뜨개질하듯 차곡차곡 엮은 소설이다. 술집이나 복덕방 문에 간판처럼 늘인 베 조각인 포렴이, 주인의 부모님이 사용하던 진열장이, 어미 길고양이가 맡기고 간 새끼고양이가, 손님이 맡긴 물건이, 어릴 적 물건을 맡겼던 손님이 화자다.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 한정적이라 자칫 지루할 수 있다는 걱정은 내려놔도 좋다. 한 사건이 종결될 때마다 화자가 바뀌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관소를 보여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보관가게는 하루 100엔만 내면 어떤 물건이든 맡아준다. 가게 주인이 맡아준 물건 중에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도 있다. 예를 들면 살해도구나 유서, 이혼서류, 돈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 같은. 이 가게의 주인은 앞을 보지 못한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해서 예사롭지 않은 물건을 맡아주는 건 아니다. 다만 보관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은 된다. 손님들이 편해 하니까.
보관가게 규칙
1.어떤 물건이든(물건의 크기, 중요도 등 상관없음)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루에 100엔.
2.물건을 맡기는 사람의 이름 (가명이어도 상관없다)은 반드시 밝힌다.
3.기한 내에 보관물을 찾으러 오지 않으면 그 물건은 보관가게가 처리한다.
4.기한이 꽉 차지 않아도 지급한 돈은 돌려주지 않는다.
5.물건은 본인이 아니면 돌려주지 않는다.

설사 물건을 찾으러 손님이 다시 오지 않더라도 보관가게 주인은 문제 삼지 않았다. 구청을 통해 판매하기도,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도,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자신이 사용하기도 했다. 소녀가 맡기고 간 부모님의 이혼서류는 다시 소녀가 찾아갔고, 주인의 유서라며 맡기고 찾아가기를 반복하던 집사도 마지막엔 유서를 다시 맡기러 오지 않았다. 부모님 이혼 후 엄마 밑에서 살던 남학생이 버리고 간 자전거는 결국 자신을 가장 아끼고 필요로 하는 자전거 가게 주인에게 돌아가고, 죽은 오빠의 물건을 찾으러 온 여자는 손님이 찾아가지 않은 돈다발이 가득 든 가방을 보관 가게 주인에게 받아가 아픈 눈을 수술한다.
보관가게 주인은 분명 쓸모와 필요의 차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세상에 모든 물건은 다 쓸모가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모든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건에 대한 가치판단은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다. 죽은 오빠의 물건을 찾으러 온 여자에게 돈다발이 든 가방을 건넨 건 여자에게 그 돈다발이 죽은 오빠가 맡긴 권총보다 더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아버지가 보관가게에 맡긴 유서를 찾으러 온 아들에게 유서보다는(집사가 유서를 찾아간 상태였지만) 진심 어린 경청과 안정을 줄 수 있는 방석을 권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체육관을 그만두기로 한 순간, 내가 체육관에 맡긴 세면도구는 필요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내게 정말 필요한 물건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체육관에 들렀겠지. 그래서 더는 맡기고 온 세면도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 물건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신경이 쓰였다. 비록 소설 속 보관가게에 맡긴 건 아니지만 필요한 누군가의 손에 갔다면 그걸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