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19

‘알 수 없음’이 알리는 것

Editor. 박중현

한국소설을 좋아합니다.
씀, 읽음, 생각함, 이야기함 모두 곁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고민과 마음, 행동과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느린’ 매체를 구독하는 느낌이랄까요? 가끔 예전 책을 뒤적이고 자주 요즘 책을 들고 오겠습니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
문학동네

소설을 읽는 독자가 괴로움을 호소하는 전통의 ‘장치’가 있다. ‘모호함’이다. ‘아 X발 꿈’이라는 온라인 밈처럼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부터, A라는 놈이 실존하는 건지 아닌지, A가 과연 A긴 한 건지 등 그 범위와 종류(?)도 다양하다. 가장 익숙한 사례로는 단연 열린 결말이다. 이는 비단 소설을 떠나 거의 모든 서사 콘텐츠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수용자를 일종의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결말이 다소 열려 있거나 해석의 여지가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초록창 연관 검색어로 ‘○○ 결말 해석’ 등이 따라붙고 관련 게시물이 호응과 비호응을 고루 얻으며 각각 갑론을박의 아고라를 형성한다. (창작자로서는 과히 흡족할 풍경이다.) 이렇듯 이야기 감상의 선명함은 수용자로서 자연스레 기대하는 요소인데, 심지어 2019년 1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아예 극적 상황마다 스토리를 시청자가 직접 선택해 보다 높은 비율에 따라가는 인터랙티브 방식마저 취했다.
할머니는 경험 많은 인간들이 외려 세상을 오해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이들은 대개 경험이 만든 틀에 갇혀 살아가니까. 육이오를 경험한 사람은 육이오에, 유신을 경험한 사람은 유신에,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가난에 갇혀 살아가는 법이다. (…)경험 많은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니 아마도 맞을 것이다. —「행자가 사라졌다!」

돌아와서, 그럼에도 왜 많은 소설이 모든 이야기를 명명백백히 하지 않거나 결말을 열어둘까? (혹은 반대로 독자로서 ‘이해는 안 되지만 좋다’는 느낌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10월 30일 4년 만의 단편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으로 돌아온 등단 26년 차 작가 이장욱의 소설은 이 ‘맛’을 느끼기에 아주 좋다. ‘이해는 안 되지만 좋다’라는 느낌마저 장담한다!) 당장 떠오르는 전작들을 꼽아보자면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통해서는 존재하는 듯하지만 실존이 희미한 ‘정귀보’라는 인물을 소실점 삼아 인간 군상으로서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며, 「고백의 제왕」의 경우 ‘고백의 제왕’으로 불렸을 만큼 발화에 특징적이었지만 결국 아무도 정확히는 추억하지 못하는 인물을 통해 소통의 단절과 수용의 일방성을 환기한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은 이와 반대로 1인칭 진술 형식을 통해 믿을 수 있는 진실과 소통에 대한 기존 관념을 해체하며 불완전성을 꼬집는다. 「천국보다 낯선」 역시 정, 김, 최라는 세 인물의 시점과 진술이 변주되며 동시에 완벽히 엇갈리는 모습을 통해 시점이 전환되듯 타자와 주체 간 관계 정립 역시 계속해서 변모하고 결국에는 해체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현실(확신)과 환상(불확신)의 경계를 지워 틔워내는 것은 단지 대상의 오롯한 민낯만은 아니다. 믿지 못한다고 해서 대상의 (혹은 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몸짓이나 노력, 생각이 일으킨 화학작용까지 지워지진 않기 때문이다. 비로소 우리는 실존에 대해 그간 관성적으로 믿고 있던 감각을 무장해제하고 대상을 다시 바라보기도 한다. 그것도 눈에 불을 켜고, 내 눈 앞에 펼쳐진 ‘진실’ 만을.
낙서 금지라는 이 낙서를 보아라. 나는 이것을 견딜 수 없다. (…)낙서를 금지하기 위해 낙서를 한 셈이니, 이 낙서는 자기 자신을 위배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낙천성 연습」
이번 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전체를 이에 등치하는 것은 물론 무리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고 더 즐거운 방식으로 여러 ‘알 수 없음’에 대해 안내한다. 동명의 디킨스 소설을 연상케 하는 구조이지만 전혀 다른 국면이 그려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치매 노인 화자를 통해 오히려 기억에서 ‘벗어나’ 대상의 실존을 환기 받을 수 있는 「양구에는 돼지코」 등이 특히 그렇다. 처음으로 독자를 반기는 단편 「행자가 사라졌다!」에서 역시 애완뱀 ‘행자’ 의 실종을 둘러싼 진실은 모호하다. 화자는 가족들을 한명 한명 용의선상에 올리며 나름대로 추리해보지만, 저마다 알리바이가 있다. 그런데, 저마다 혐의점 또한 있다. 마침내 애완뱀 ‘행자’와 이름이 같은 초로의 할머니에까지 생각이 미치며 소설이 밝히는 것은 이미 뱀의 행방 따위가 아니다. …행자가 어디로 갔는지가 과연 중요할까? 언뜻 이를 좇는 게 주요 서사처럼 보였던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행자’를 통해 ‘다시’ 바라본 가족들과 또 다른 행자다. 행자가 아니었으면 보거나 떠올리지 못했을 얼굴이다. 대상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은 대상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일 때도 있다는 것은 아니러니하지만, 핍진하다. …그래서 행자가 어디 갔냐고? 아니, 이미 당신은 행자 따위 잊고 다른 ‘무언가’에 골몰해 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