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anuary, 2021

불편할수록 가까워지는 진실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외 3명 지음
민음사

나의 독서 편력은 오랫동안 문학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스쳤고, 독서 편력을 폭넓게 확산시키고자 낯선 독서 모임에 등록했다. 우선, 지인들이 추천해준 책을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양한 장르의 책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와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을 추천받았다. ‘드디어’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인 이유는 이 책이 출간 이후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한동안 미뤄 놓은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여성의 ‘성’이 남성에게 유린당하는 범죄 영화를 다룬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 차원에서 함부로 다루어지는 여성관을 살펴보는 내내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반복해서 다루는 성범죄 소재에,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불편한 진실에, 쉽게 간과했던 일상적 성범죄들에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 끝에는 이제라도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일종의 연대 의식이 자리잡았다.
특히 데이트 폭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해 양상인 가스라이팅gaslighting(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을 다룬 영화는 여전히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가부장적 사고관을 되돌아보게 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개인에게 행해지는 가스라이팅은 명백한 범죄로 인정되지만, 이미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는 가스라이팅은 그 뿌리가 너무 깊어 쉽사리 뽑히지 않고 있다. 그 밑바닥에 경제력, 지위, 연령 등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컴플라이언스〉에는 권위에 복종하고 침묵함으로써 발생되는 성범죄가 등장한다. 나치 강제수용소의 감독관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의아함을 품고도 곁가지 문제에 눈을 감아버리고,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개인의 안일함은 타인의 성을 너무도 쉽게 착취한다. 피해자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들이 각종 성범죄 만연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기괴한 상황들이 모두 실화라니. 그 황량함에 아연해진다.
부지불식간 자행되는 성범죄의 일상화에 관한 담론을 영화로 풀어내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많은 관객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으며 사회적 반향을 크게 일으켰던 영화 〈도가니〉가 떠올랐다. 영화의 흥행을 계기로 과거 수사 기록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과 처벌이 이루어졌고, 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 기준이 심화되고 대상이 확대되었다. 스크린을 넘어 현실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화의 저력을 새삼 증명한 셈이다.
책은 〈기생충〉이나 〈조커〉와 같이 사회적 계급 차가 더욱 커진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 영화도 다룬다. 다각도로 들여다 보는 성범죄의 실체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참담한 장면들이 펼쳐지지만 그럴수록 두 눈 부릅뜨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전처럼 무심결에 지나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관심 속에서 피해자로 소비되다 마는 여성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보다 온당해지기를 소원하며,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을 하나씩 다시 보고 있는 요즘이다. 내가 보지 못한 참상을 목격하기 위해서, 똑바로 보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