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anuary, 2021

경계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

글.김민섭

작가, 북크루 대표. 책을 쓰고,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허태준 지음
호밀밭

얼마 전 정지우 작가가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올해 남은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알리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알리는 데 쓰고 싶다.” 정지우 작가의 글과 삶을 신뢰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가 이렇게까지 서평을 남기는데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와는 그렇게 만났다. 몇 페이지를 읽다가 나는 그가 왜 그런 찬사를 보냈는지 곧 알게 되었다. 알려야 할 책이었고 세상에 나와야 할 책이었다. 나도 이 책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서평을 보태는 바다. 올해 남은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알리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나 역시 이 책을 알리는 데 쓰고 싶다, 라고.
저자는 스무 살 청년 허태준 씨다. 그는 부산기계공업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현장 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3년 7개월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우리는 교복 위에 작업복을 덧입은 청소년의 모습과 그들이 노동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노동이란 적어도 이런저런 준비 과정을 거쳐 20대 중반에야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래도 믿으니까. 그는 일하는 청소년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경계의 시간, 이름 없는 시절”이었다고 규정한다. 나는 이 구절을 본 순간부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방시)라는 나의 책을 떠올렸다. 나도 대학원생 연구자로서의 삶을 ‘경계인’으로 규정했다. 학생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309동 1201호’라는 필명처럼 이름 없는 경계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계속 공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 교수가 되기 어렵다고만 막연히 짐작할 뿐 그들의 노동 환경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들이 어떻게 논문을 심사받고 어떻게 시간강사가 되며 왜 근로계약서를 발급받거나 4대 보험을 보장받을 수 없는 노동자가 되는지, 그 당사자들이 직접 고백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고백과 기록은 몹시 귀하다.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발견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시내를 걷다가 수험생들을 위한 할인이나 혜택을 제공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던 열아홉의 나는 수고하지 않았던 걸까’하고 생각한다.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거리의 광고문구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수고한 사람이었다. 전국적으로 고졸 취업을 밀어주던 시기에 온갖 기업에서 채용공고가 올라왔고, 모두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며 때로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그 수고로움을 알아주는 사람 또한 그들 자신 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무 살이 되던 날, 각자의 상황과 관계없이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대개 비장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정의로움이나 멋짐을 내세우거나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고 분노했는지, 그 감정만을 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담담함에 있다. 변명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신보다 나은 타인을 발견하면서 고백의 서사를 완성해 나간다. 이것은 연습한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아마도 저자가 가진 선한천성 덕분이 아닐까 한다. 이런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나면 나도 왠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를 대신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것 같다. 담담한 글은 이렇듯 타인의 정(情)을 움직이기에 힘이 세다.
청년 노동자 허태준 작가의 두 번째 책이 기다려진다. 중심부도 아니고 주변부도 아닌 그 경계에 위치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어떤 풍경이 있다. 게다가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의 몸은 운이 좋으면 중심부로, 운이 나쁘면 주변부로 이동하게 된다. 경계에 오래 머무르게 된다고 해도 초기의 풍경은 조금씩 사라진다. 정확히 말하면 무디어지게 된다. 나는 다시 지방대 시간강사 이야기 같은 글을 쓸 자신이 없다. 그때의 감각은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쓸 두번째 책이 더욱 기다려진다. 여전히 경계에 있지만 청소년이라는 경계에서 막 벗어난 그가 더 멋진 책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고백 서사가 계속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반드시 밖으로 나와야 할 책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