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20

고통을 관통해 나아가는 자세

Editor.김정희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문학동네

2019년 가을, 하늘은 감탄의 지수를 갱신하며 매일이 아름다웠다. 가을 하늘답게 높고 선명하며, 구름의 무늬는 다채로웠다. 겨울이 다가오면 뿌연 안개 같은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을 것을 예상하며, 2019년의 가을 하늘을 하루하루 소중히 감상했다. 그런데 웬걸, 2019년 겨울에 우리나라를 뒤덮었던 것은 미세먼지가 아닌 코로나19였다. 곧 있으면, 조금만 견디면 끝나겠지 했던 안일한 마음과 달리 우리는 지금 근 9개월째 코로나19가 잠식해가는 우리의 일상에 적응을 해나가려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바이러스가 삶을 잠식해가는 과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현 상황과 너무나 비슷해 재조명된 고전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이다. 작은 도시 오랑은 특별할 것 없이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자리해 있는 삶의 공간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견뎌내는 줄도 모르게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런 도시에 어느 날 난데없이 죽은 쥐의 시체가 속출한다. 죽은 쥐의 시체와 피, 그것을 마주한 사람들의 사타구니에 뭉치는 멍울과 고열, 그렇게 페스트는 오랑에 등장했다. 우리가 코로나19를 그저 지나가는 바이러스로 생각했듯이, 이곳 오랑에서도 사람들은 재앙을 곧 ‘지나가버릴 악몽’ 정도로 여긴다. 도시 봉쇄령이 내려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페스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때 사람들 마음속에 평범한 일상의 빛이 되고 동력이 되었던 삶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어 진부하지만, 아무나 진정으로 갖지 못하는 ‘사랑’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삶’이다. 도시가 봉쇄되자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은 과거를 추억하고 후회의 쓰라림을 맛보는 동시에 사랑을 새롭게 인식한다. 오랑의 시민들은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는 혐오스럽고 미래마저 박탈당한 처지여서, 인간에 대한 정의감이나 증오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 자들과 비슷”한 삶의 시간을 마주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이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리는 것을 느낀다. 마침내 오랜 시간 정련된 진정한 마음은 상투적인 말에 자리를 내어주고 사람들은 감정의 빗장을 잠근 채 고통의 일상을 견디어 간다. 고통이 고통이지 않으려면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것과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실체를 외면하면 한결 견디기가 쉬워진다. 그렇게 페스트의 고통은 사람들에게 내면화되고, 페스트의 문제는 일상을 파고들어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페스트는 특별한 바이러스가 아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고 맞닥뜨릴 수 있는 고통과 악의 모습이다. 그리고 여기, 페스트를 관통해 가며 카뮈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의사리외가 있다. 『이방인』과는 다르게 인물의 모습이 자못 도덕적이어서 의아할 정도이지만, 결국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가 말한다. “세계의 질서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이상,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는 신에게 기대기보다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 관념적인 철학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고통을 관통해가는 삶의 자세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그리고 리외와 함께하는 랑베르와 타루가 있다. 랑베르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오랑을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오랑에 남아 페스트 감염자를 돕는 일을 택한다. 타루는 삶의 문제에서 한 걸음 떨어져 뭇사람들을 관찰하는 듯하지만, 보건대를 조직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페스트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이 세 인물이 빛나는 점은 영웅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거창한 신념에 의거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고통과 불안 가운데 인간의 욕망과 사치는 비루하다. 삶의 본질을 직시하고 지켜내야 하는 묵중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돈 후안과 어린아이의 죽음’은 명백히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서 두 인물은 까닭없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은 일이다. 아무 죄가 없는 어린아이가 고통에 찬 죽음을 맞이해야 할 이유를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자비한 모습으로 평등하게 내리꽂히는 죽음의 ‘거대한 분노’ 앞에서 잠시 신의 위상이 휘청거린다. 그 앞에서 리외는 되새긴다. 리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건강을 위해 병과 죽음에 대항하여 인간으로서 싸울 뿐이다. 어느새 페스트는 물러갔지만 페스트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마음속엔 지워지지 않을 무력감과 패배감이 남아 있을 것이다. 고통 앞에서 인간의 품위가 속절없이 무너진 광경을 보았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식은 인간의 삶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을 테고, 다시 희망을 품으며 인간다움을 지켜나갔을 것이다.
지난가을에 이어 2020년의 봄, 여름까지 변함없이 하늘이 맑고 푸르다. 매일이 경이롭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깨닫는다. 저 맑은 하늘이 사실은 우리가 마땅히 누렸어야 하는 하늘이라는 것을. 코로나19는 언젠가 지나갈 테지만 또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시 강타해올것이다. 그때에 비일상의 일상화를 절실하게 경험한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이제 우리는 북유럽 어린 소녀의 외침이 아니어도 인간 삶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지점에 서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