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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0

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면 몰라도…

Editor.지은경

『서머싯 몸 단편집』
서머싯 몸 지음 윤형묵 옮김
청목

젊은 시절을 타향에서 보내본 사람들은 아마도 한두 푼의 돈에 손이 벌벌 떨리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적어도 부자가 아니라면 그 기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다.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젊은 나이에 외국에 살며 문화와 감성을 충전해보고자 하지만 그 좋은 것들을 전부 느끼기엔 주머니 사정은 언제나 앞서는 마음을 잡아맨다. 외국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오랜만에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며칠간 신세 좀 지면 안되겠냐고 연락이 왔다. 흔쾌히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들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비싼 호텔 값을 절약하기 위해 가난한 유학생 집을 점령하는 것이고, 그렇게 와서는 명품거리를 돌아다니며 가방이며 신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재끼는 것이다. 우리 집의 물을 마시고, 냉장고에 들어있던 과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먹고, 소중하게 쟁여둔 신라면을 끓여 입안으로 후루룩 처넣는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보다 못해 장을 보러 가자고 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나선다. 식료품을 이것저것 담으며 “너는 뭐 살 거 없니?”라고 물으면 눈을 피하며 “아니, 난 별로 먹고 싶은 게 없어”라고 한다. 그러다가 계산대에 장바구니를 올려놓는 순간 어디선가 비싼 초콜릿 무스를 들고 나타나 내 장바구니 안에 슬며시 얹는다.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지갑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며칠이나 얻어먹고 자고 했으면 장 한 번쯤은 계산해 주겠지, 그래도 염치는 있겠지…’ 그러나 결국 그 친구는 염치가 없는 인간으로 판명이 났다. 내가 물건을 계산대에 올리자마자 재빨리 계산대를 통과하고는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으며 돕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봤자 한 번인데, 그쯤이야 멀리서 온 여행객들을 따뜻하게 맞아줄 법도 하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생의 입장에서는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매력 덕분에 한 번쯤 여행을 오는 여행자들이 계절마다 수두룩하다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그중에는 한국에서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지내는 사이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는 상냥한 목소리로 집에 묵어도 되겠냐는 부탁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잘도 한다.
서머싯 몸의 「점심식사」는 몇 안 되는, 내가 좋아하는 단편소설이다. 고결하려고 애쓰지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초조함과 분노, 조롱 섞인 이야기, 음식을 주문하며 여유로운 척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돈 계산을 해 대느라 뜨겁게 달아올랐을 작가의 머릿속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아마도 20년 전 파리에서 돈벌며 공부하며 어렵게 살던 내 처지가 떠올라 더욱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 풍족하지 못한 사람을 대하는 둔하기 짝이 없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그 여유 없음이 정말 가소롭고 얄미운 나머지 「점심식사」에 등장하는 그녀를 온 마음을 다해 증오하며 읽었더랬다.
파리에 살고 있던 작가는 공동묘지가 내려다보이는 라탱 지구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던 가난한 작가의 책을 읽고 어느 여성이 감상평을 적어보내 온다. 작가는 이에 감사의 답장을 보냈는데 이후 그녀는 파리를 지날 일이 있으니 작가와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매우 비싼 레스토랑을 골라 점심을 사라고 요청한다. 작가의 생활 수준으로는 가당치 않은 고급 식당이었지만 당시 작가는 여성의 청을 거절할 만큼 강한 베짱이 없었기에 바보처럼 그대로 식사에 초대를 하기로 하며이야기는 전개된다.
“전 점심땐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라고 계속해서 읊어 대는 그녀의 탐욕스러운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더니 값비싼 요리들만 골라 주문하는 그녀는 아마도 악한뜻을 가지고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배려심 없고 남의 사정따위는 관심도 없지만 동시에 자신은 최고의 취향과 품격을 가졌으며 그에 못 미치는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 가르침까지 주고자 하는 알량한 자존심을 갖추었을 뿐이다. 생선과 알젓에 이어 샴페인까지 주문한 그녀는 “나는 원래 점심식사를 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식당에서 가장 저렴한 양고기 편육을 주문한 작가의 속사정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고기는 현명치 못한 선택이라고 그녀는 지적을 한다. “편육같은 무거운(소화가 잘 안되는) 음식을 잡수시고 난 다음에 어떻게 창작을 하실 수 있으실는지 모르겠구먼요. 전 제 위를 혹사한다는 것에 대해선 찬성할 수 없어요.” 암요, 그러시겠지요. 탐욕스러운 여인네 같으니라고!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그녀가 귀하디 귀한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 없어, 일 없어. 난 점심 땐 아무것도 안 드는 사람이니까. 한 입 이외에는 말야. 난
그 이상 절대 필요 없어요. 그것도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데 심심풀이로 먹는 거예요. 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면 몰라도 그 밖엔 정말 아무것도 안 먹어요. 아스파라거스 하나 못 먹고 파리를 떠나간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깐.” 작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스파라거스는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해 봤을 뿐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비싼 음식이었다. 큰 아스파라거스가 있냐고 갸르송(종업원)에게 물어보면서도 내심 없다고 말해주길 기대하지만 얄밉게도 “깜짝 놀라실 만큼 크고 맛있고 녹신녹신한 놈이 있습죠” 라고 종업원이 대답하는 것이다. 생활비로 얼마를 남겨둘 수 있을지 고민하던 점심식사는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하며 과연 이 식사 비용을 전부 지불할 수 있을 지의 고민으로 치닫는다.
“아스파라거스가 나왔다. 큼직하고 국물이 흥건하게 괴어 있고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놈이었다. 무르녹은 버터의 냄새가 나의 콧구멍을 설먹설먹하게 해주었다. 기특한 유태인들이 불에 구운 현물을 바쳤을 때 여호와의 콧구멍이 설먹거렸던 것처럼. 염치도 없는 그 여인이 크고도 요염한 그 입 가득이 아스파라거스를 처넣고 삼키는 꼴을 바라보며 여전히 나는 정중한 태도로, 발칸 제국의 연극 현황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누구나 아스파라거스를 구입할 수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유럽에서 아스파라거스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즐기는 섬세하고도 우아한 재료로 여겨지며 왕의 채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소한 버터 덩어리가 뜨거운 물에서 방금 삶아낸 아스파라거스 위에서 녹아내리고 있다. 봉우리 쪽으로 갈수록 특유의 맛이 짙어지는 이 식물은 아삭한 식감이면서도 버터와 만나면 환상적인 궁합을 펼쳐 보이며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특별함을 가졌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아스파라거스 덕분에 자신의 요강이 향기로운 향수 단지로 바뀌었다며 즐거워했다. 신장에 이로운 작용을 해 몸 안의 노폐물을 빼내는 효능을 두고 그 냄새가 향기롭다는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특별한 채소인 아스파라거스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1. 끓는 물에 깨끗하게 손질한 아스파라거스를 넣고 3~4분 삶는다.
2. 가열된 팬에 버터 한 스푼을 넣어 약간의 갈색을 띠도록 중불에 녹인다.
3. 팬의 불을 끄고 그 위에 삶은 아스파라거스를 담는다. 녹은 버터가 아스파라거스를 골고루 감쌀 수 있도록 잘 저어준 후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4. 접시에 버터국물과 함께 아스파라거스를 올린 후 기호에 따라 파마산 가루를 조금 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