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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0

무언가 하라고, 멈추게 하라고

Editor.김복희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매일 긴급재난문자가 온다. 집 근처에 확진자가 생겼다거나, 비 피해에 관한 문자들이다. 주말에는 꼭 이런저런 위생을 조심하고 외출을 삼가라는 당부 문자가 온다. 일도 많이 줄었고,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매일이 쉽지 않다. 그냥 이례적인 한때라고 하기에는 이 모든 재난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지구상의 우리가 모두 인간과 인간 아닌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는 새롭지 않지만 잊기 쉬운 법칙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국경을 닫아걸고 살아가기에 지구상의 인간은 다른 인간을, 다른 존재를, 너무나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독도 고독이지만, 식량과 연료 때문에라도 그렇다. 우리는 여느 때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이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뉴노멀에서 그냥 노멀이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을 되돌려 받을 수 없으리란 예측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감염병은 다각도에서 우리에게 무언가 하라고, 혹은 무언가 멈추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전 7권)는 동명의 애니메이션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만화책인데, 애니메이션은 만화책 내용의 7분의 1 정도라고 생각하면 알맞다. 인류가 과학기술 문명으로 인해 거의 멸망할 뻔한 먼 미래가 배경이다. 문명의 결정체였던 ‘거신병’이 도시들을 다 파괴한다. 인간을 밀어내고 생겨난 부해(腐海)라고 불리는 거대한 숲이 지구 곳곳을 차지하는데, 이곳은 식물이 날리는 유독한 포자와 거대한 곤충들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기 어려운 땅이 되었다. 이후 인류는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소박한 수준의 기술과 과거 문명의 잔해에 매달려 살아가게 된다. 자연을 두려워하면서 말이다.만화의 초반만 보자면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다. 아주 많은 사람이 전쟁과 재난으로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경작 지대의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나 부해의 유독한 공기로 인한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독한 공기를 막아줄 마스크는 필수품이며,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다섯에 넷은 다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
과학 기술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인간의 삶이란 지금보다 더 끊임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예측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삶일 것이다. 모든 과학 기술을 다 멈추고,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류 외의 존재에게는 이로울 수 있으나 인류에게는 다시 식량난, 질병, 자연재해를 전혀 방어할 수 없는 세계로 돌아가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이들부터 절멸한다. 약한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곳은 절대 낙원일 수 없다. 따라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도 우리에게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딘지 낯설지 않다. 모든 상상은 현실에 기반한다. 그러니까 이 미래의 근사치를 우리가 갖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전염병과 무관하지 않은 기후위기가 이미 닥쳐왔고 2030년에 지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간의 수많은 징후를 우리가 무시해 왔고, 이제 오염 요인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지구를 되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오염 요인을 아예 없애는 것이 그나마 지구의 끝을 늦추는 길이라고 한다. 지구를 살리려면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는 둥의 말이 괜한 흰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을 것이니, 어차피 허무한 것이니, 미래 따위 걱정 말고 해오던 그대로 오염을 방관하고 조장하는 허무주의적 방종이 나는 싫어졌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나, 용서할 수는 없어졌다. 물론 그들을 내칠 수도 없고 비난할 수도 없지만.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닮기를 꿈꾸기엔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거대한 곤충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부해의 의미까지도 알아내는 통찰력 있는 지도자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인간 개개인도 사랑할 줄 안다. 그녀는 끝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허무에 빠졌다가도, 다시 살아가고자 허무에서 벗어난다. 타인의 도움을 받을 줄 알며, 도움을 줄 줄도 안다. 우리 모두가 나우시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폐허 이후에도 살아가는 일이 남아있다면,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면, 절망과 냉소는 일단 멈춰보자고 말하겠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