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April, 2016

분류: N/A(Not Applicable)

Editor. 유대란

다른 삶, 해보지 않은 선택, 독특한 취향은 두려움이나 기피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상태를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것을 ‘이상한 것’으로 분류하거나, 분류에서 아예 제외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것이 실수인 이유는 직간접적으로 남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에서는 그런 배제와 침해를 그른 것으로 간주하는데 윤리적인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내가 반발하는 이유는 지루함 때문이다. 다르고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예측 가능한 것으로만 꾸려진 삶은 얼마나 지루한가. 항상 안전한 선택과 정해진 분류에 자신을 옭아매는 사람들은 얼마나 따분한가. 독서도 그런 것 같다. 익숙한 분류, 선호하는 작가의 책을 일관되게 선택하면 실패할 확률은 줄어들지만, 새로운 질문들을 마주할 기회도 덩달아 줄어든다. 모퉁이를 지나면 반전이 나타나겠지, 이쯤에서 결론이 나겠거니,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어떤 감상을 남길 것인지 예측되는 책들은 우리를 매너리즘에 빠트린다. 존재하리라고 생각지 못한 질문들과 마주하기 위해서 분류되지 않는 ‘이상한’ 책들을 본다. 모험 앞에서 보들레르의 말에 용기를 얻는다. “이상함은 아름다움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남편의 아름다움』 앤 카슨 지음
한겨레출판

앤 카슨의 글자들은 종이 위에 얌전히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시인의 작품들은 무대에서 춤과 음악과 어우러지고 미술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머스 커닝햄 무용단, 행위예술가 로리 앤더슨, 가수 루 리드, 시각예술가 킴 아노 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실험적인 작업을 해온 그는 “삶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지루함이고 지루함을 피하는 것이 인생의 과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앤 카슨은 그런 작가다. 지루함을 피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남편의 아름다움』은 이런 작가의 시인지 소설인지 부조리극인지 정의할 수 없는 독특한, 그러나 그녀로서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책 속에는 외도하는 남편으로 고통받는 아내가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을 다치게 하는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남편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아내에겐 아름다움만이 진리이며, 그것이 그녀가 삶에서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전부다. 29개의 장의 서두를 장식하는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구절들은 이런 설정에 더없이 어울린다. 25세의 나이에 요절할 때까지 키츠는 오로지 아름다움의 찬양과 창조에 몰두했다.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라는 부제는 텍스트의 구조를 암시하는 것이다. 책 속 텍스트의 길이, 호흡은 일정치 않다. 마치 탱고에서 짧은 스텝과 긴 스텝이 교차하고 미끄러지듯 29개의 텍스트 중 어떤 편은 시와 소설의 중간 형태를 지니고, 또 어떤 편은 서사에서 잠시 비껴간, 마치 스핀오프식의 독백극을 보는 듯하다. 열정과 관능, 비애를 보여주는 한 편의 탱고처럼 아내도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낸다. 그녀는 고백하고, 기록하고, 대화하고, 독백하고, 절규하고, 침묵한다.
남편과 결별하고 나서도 아내는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속박되길 자처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실로 신비로운 수수께끼라고 느낀다. 키츠 외에도 책 곳곳에 인용된 고전의 무게와 파격적인 형식이 주는 아름다움은 이 신비로움에 가담하고 있다.

『이상한 소파』 에드워드 고리 지음
미메시스

작가이자 화가,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였던 에드워드 고리는 이상한 그림책을 많이 남겼다. 펜과 잉크로 그려진 고리의 그림책들은 고딕스러운 매력을 풍기는데, 해독이 참 어렵다. 그림은 연속성을 거부하고, 언어는 전달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제목부터 이상한 이 책의 부제는 더 기묘하다. ‘오그드레드 위어리의 재미있는 포르노’.
『이상한 소파』는 야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 포르노다. 앨리스는 어느 날 허버트라는 남자를 만나 택시 안에서 일을 저지른다. 허버트는 앨리스를 자신의 숙모 실리아 부인의 집에 데려가서 ‘엄지 더듬기’라는 게임을 한다. 그 집의 집사인 앨버트도 합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어느 날 찾아온 길버트 대령 부부는 둘 다 한쪽 발이 의족인데 온갖 재미있는 재주를 부린다. 그들은 길버트 씨 가족과 주말을 보내러 가는데 길버트의 딸과 그의 애인 제럴드가 장식용 항아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 저녁 서재에서 손님 중 하나가 ‘리투아니아산 타자기’ 흉내를 실감 나게 보여줬다. 그리고 제럴드가 어떤 여자에게 스튜 냄비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다음 날 그녀는 숨을 거둔다. 모두 분위기를 전환하자며 또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또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마지막에 이상한 소파가 등장한다. (이 요약 역시 이상하게 읽히겠지만 무성의해서가 아니다. 책의 내용이 정말 이렇다.)
일련의 불연속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 독자는 고립된다. 의문과 예감만 무성해진다. ‘엄지 더듬기’가 무슨 게임인지, 길버트 내외가 의족으로 어떤 묘기를 보여주고, 길버트의 딸과 애인은 왜 장식용 항아리에 들어가 있었으며, ‘리투아니아산 타자기’ 흉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힌트는 없다. 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해지는 가운데 책은 천연덕스럽게 끝이 나버린다. 책을 덮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는 의문은 작품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 된다. 책 속의 음울함, 서정, 건조한 유머, 괴기스러움, 불길함에 지배당하다가 당혹스러움을 겪는 건 비명을 지르는 책 속의 인물이 아닌 ‘내’가 된다.

『나랑 상관없음』 모니카 사볼로 지음
문학테라피

‘이런 미친 X!’이라는 반응을 시도 때도 없이 유발하는 책이다. 그것은 이 이상한 소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찬사가 될 수도 있다.주인공 MS는 실연 후 집착과 강박 증세를 보이며 괴로운 나날들을 기록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XX의 몸짓, 말 한마디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멈추지 못하고 온갖 연애의 파편들을 불쑥불쑥 끄집어낸다. XX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그의 오토바이 사진, 라이터, 오고 간 메일의 일부, 사무실의 배치도, 해결사 전단지, 엄마의 젊을 적 사진 등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간중간 이런 사물과 편린들을 여과 없이 나열한다. 그것들은 전후 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으며, 화자인 MS는 부연을 해주기는커녕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인해 화자로서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래서 이 책은 실연으로 인한 경증의 정신 이상을 앓고 있는 환자에 관한 보고서 같기도 하며, 자전적인 요소를 소재로 한 현대미술 작품 같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자는 거의 퍼즐 맞추기에 가까운 독서를 해야 한다. 퍼즐 상자에 그려진 완전한 그림을 머릿속에서 되뇌며 퍼즐 조각을 하나씩 끼워보듯이, 각자의 경험과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자신의 기억 속을 수색해서 단서를 찾아보고 나서야 MS의 행동과 그녀가 드러내는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각자의 언어로 치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서사나 감정선이 분명한 기존 소설들에 비해 읽기 번거롭고 괴롭지만, 독자의 자발적 해석을 거듭 개입시킴으로써 새로운 독서 경험을 안겨준다. 그것은 매끄럽고 완전한 관계에서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비밀리에 즐기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혓바늘이 돋은 곳을 계속 혀로 건드리고, 상처 딱지를 가만두고는 못 배기는 성미의 사람들, 상처와 쾌락 사이에서 자신의 기호를 확실히 찾지 못한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 같은 독서 경험이랄까. 몇 장 못 가서 ‘이것도 소설이야?’라는 짜증을 내뱉고 싶을 수도 있지만, 혁신적인 소설에 부여하는 프랑스의 플로르상의 권위를 믿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