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anuary, 2020
감각의 확장
Editor. 김선주
읽고 싶은 책은 날로 늘어가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독자.
작은 책방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책들을 수집 중.
![](http://www.chaeg.co.kr/chaegBravo/wp-content/uploads/2020/01/2001_choice_main_03.jpg)
오이뮤 지음
혹시 ‘하늘색’ 하면 무슨 색이 떠오르는가? 파란 물감에 흰 물감을 섞은 듯한 밝은 파랑? 아마 대부분 비슷한 색을 떠올릴 듯한데, 사실 누군가에게 하늘색은 노을 지는 하늘의 뜨거운 붉은색, 눈 내리기 직전 하늘의 회백색, 밤하늘의 짙은 검푸른색 등 다양한 빛깔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답고 다양한 빛깔을 ‘하늘색’이라는 단어에 가두자니 아까울 정도다. 하늘색뿐만이 아니다. 나무는 나무의 종류마다 계절마다 다 다른데, 나무를 그릴 때 잎사귀는 초록색(기껏해야 연두색), 줄기는 갈색으로만 칠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나무줄기에도 적갈색과 회갈색, 솔방울색이 있다는 걸, 잎사귀에는 진녹색과 암녹색, 상록수색과 잣나무색이 있다는 걸 안다면 나무를 초록과 갈색으로 단일화하지 않고 조금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색은 무궁무진한데,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색이름은 너무나도 한정적이다. 그나마 사용하는 색이름도 카키, 민트, 아이보리색 등 외래어로 된 것이 많아 무슨 색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색에 대한 심상이 저마다 달라 의사소통에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우리말이다.
아이보리색을 연근색이나 두부색으로 표현하면 아이보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색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다. 또한 색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냥 노랗다고 하기엔 애매한 색들, 노르스름하거나 샛노랗거나 누리끼리한 것들을 맛깔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색을 표현함에 있어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 이름으로 우리말 색이름을 붙이는 시도 끝에 『색이름 352』를 만들었다. 한국색채연구소에서 낸 『우리말 색이름 사전』을 오이뮤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시대정서와 동떨어진 색이름이나 외래어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 속 풍경에서 가장 보편적인 색상을 찾아 352가지 색으로 정리했다. 64색 크레파스도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 352가지라니, 그동안 내가 알던 색의 세계가 얼마나 좁았던가 싶을 만큼 두께도 두툼하다. 책은 일단 먼셀 기호 표시법을 기준으로 계통색에 따라 색을 분류하고, 그 안에서 명도와 채도 순으로 나열했다.
여기에 무채색과 금색, 은색과 같은 특수색을 추가했으며, CMYK, RGB, HEX 등 객관적인 색의 값도 함께 기재해 유용성을 더했다. 또한 모든 색이름에 대응하는 단색 일러스트를 함께 담았는데, 초록색은 소주병, 연홍색은 연꽃 등 그 색의 심상을 가장 잘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 사물이나 추상적 질감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렇게 가져온 사물의 특징이나 쓰임새, 문화와 과학에 관한 설명을 함께 담아 색에 대한 지식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지점은 독립출판 작가들과의 협업에 있다. 구달, 박지용, 우세계, 김봉철 등 ‘청춘문고’ 시리즈 작가 12명이 계통별로 2가지 이상의 색이름을 선택하고 여기서 영감을 받아 쓴 단편적인 글은 색이름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같은 색을 바라보더라도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도 가도 갈대숲은 끝이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흙 냄새가 났다. 어느새 눈을 감은 듯 주위가 어두워졌을 때. 누군가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본다. 흔들린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김종완
익숙한 우리말로 된 색이름을 입으로 조용히 읊조리면 맛이나 향, 냄새와 감촉이 느껴지는 듯하다. ‘녹차색’ 하면 은근하게 우러난 씁쓸함이 떠오르고, ‘안개색’ 하면 축축하고 뿌연 느낌이 같이 떠오른다. 도토리묵색이나 고무대야색은 이보다 더 적확한 이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질감과 색이 눈앞에 생생하다. 352가지의 색을 한번 쭉 훑어보고 나면 이제 노란색과 유채꽃색, 해바라기꽃색이 각자 다르고, 청포도색과 연두색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검정도 다 같은 검정이 아니라 거무칙칙한 것, 거무스름한 것, 가무잡잡한 것, 까만 것으로 세밀하게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제 삶은 더욱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