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anuary, 2020

감각의 확장

Editor. 김선주

읽고 싶은 책은 날로 늘어가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독자.
작은 책방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책들을 수집 중.

『색이름 352』
오이뮤 지음

혹시 ‘하늘색’ 하면 무슨 색이 떠오르는가? 파란 물감에 흰 물감을 섞은 듯한 밝은 파랑? 아마 대부분 비슷한 색을 떠올릴 듯한데, 사실 누군가에게 하늘색은 노을 지는 하늘의 뜨거운 붉은색, 눈 내리기 직전 하늘의 회백색, 밤하늘의 짙은 검푸른색 등 다양한 빛깔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답고 다양한 빛깔을 ‘하늘색’이라는 단어에 가두자니 아까울 정도다. 하늘색뿐만이 아니다. 나무는 나무의 종류마다 계절마다 다 다른데, 나무를 그릴 때 잎사귀는 초록색(기껏해야 연두색), 줄기는 갈색으로만 칠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나무줄기에도 적갈색과 회갈색, 솔방울색이 있다는 걸, 잎사귀에는 진녹색과 암녹색, 상록수색과 잣나무색이 있다는 걸 안다면 나무를 초록과 갈색으로 단일화하지 않고 조금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색은 무궁무진한데,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색이름은 너무나도 한정적이다. 그나마 사용하는 색이름도 카키, 민트, 아이보리색 등 외래어로 된 것이 많아 무슨 색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색에 대한 심상이 저마다 달라 의사소통에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우리말이다.
아이보리색을 연근색이나 두부색으로 표현하면 아이보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색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다. 또한 색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냥 노랗다고 하기엔 애매한 색들, 노르스름하거나 샛노랗거나 누리끼리한 것들을 맛깔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색을 표현함에 있어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 이름으로 우리말 색이름을 붙이는 시도 끝에 『색이름 352』를 만들었다. 한국색채연구소에서 낸 『우리말 색이름 사전』을 오이뮤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시대정서와 동떨어진 색이름이나 외래어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 속 풍경에서 가장 보편적인 색상을 찾아 352가지 색으로 정리했다. 64색 크레파스도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 352가지라니, 그동안 내가 알던 색의 세계가 얼마나 좁았던가 싶을 만큼 두께도 두툼하다. 책은 일단 먼셀 기호 표시법을 기준으로 계통색에 따라 색을 분류하고, 그 안에서 명도와 채도 순으로 나열했다.
여기에 무채색과 금색, 은색과 같은 특수색을 추가했으며, CMYK, RGB, HEX 등 객관적인 색의 값도 함께 기재해 유용성을 더했다. 또한 모든 색이름에 대응하는 단색 일러스트를 함께 담았는데, 초록색은 소주병, 연홍색은 연꽃 등 그 색의 심상을 가장 잘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 사물이나 추상적 질감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렇게 가져온 사물의 특징이나 쓰임새, 문화와 과학에 관한 설명을 함께 담아 색에 대한 지식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지점은 독립출판 작가들과의 협업에 있다. 구달, 박지용, 우세계, 김봉철 등 ‘청춘문고’ 시리즈 작가 12명이 계통별로 2가지 이상의 색이름을 선택하고 여기서 영감을 받아 쓴 단편적인 글은 색이름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같은 색을 바라보더라도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도 가도 갈대숲은 끝이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흙 냄새가 났다. 어느새 눈을 감은 듯 주위가 어두워졌을 때. 누군가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본다. 흔들린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김종완
익숙한 우리말로 된 색이름을 입으로 조용히 읊조리면 맛이나 향, 냄새와 감촉이 느껴지는 듯하다. ‘녹차색’ 하면 은근하게 우러난 씁쓸함이 떠오르고, ‘안개색’ 하면 축축하고 뿌연 느낌이 같이 떠오른다. 도토리묵색이나 고무대야색은 이보다 더 적확한 이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질감과 색이 눈앞에 생생하다. 352가지의 색을 한번 쭉 훑어보고 나면 이제 노란색과 유채꽃색, 해바라기꽃색이 각자 다르고, 청포도색과 연두색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검정도 다 같은 검정이 아니라 거무칙칙한 것, 거무스름한 것, 가무잡잡한 것, 까만 것으로 세밀하게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제 삶은 더욱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