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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18

죽어 보실래요?

Editor. 박중현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불친절하고 사적인 한 마디.
“읽은 후 내 이름을 넣어보자.”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창비

우리는 왜 죽을까? 병에 걸려서? 사고로? 만약 질병에도 걸리지 않고 불의의 사건·사고도 겪지 않는다면? 그래도 죽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수명이 있으니 언젠가 늙어 죽을 것이다. 세포가 노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되더라도 언젠가 죽긴 죽을 것이다. ‘죽음’이란 ‘태어남’을 겪은 생명체라면 절대로 비껴갈 수 없는 본질이자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노라면 ‘인간은 왜 죽을까?’라는 질문은 ‘치킨은 왜 맛있을까?’라는 질문처럼 하등 쓸데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치킨이니까 맛있지. 인간이니까 죽지. 인간은 본디 그냥 죽는 존재니까.
대충 ‘그냥’이라는 수사를 갖다 붙여도 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죽음은 인간에게 태어남만큼이나 보편하다. 주변인으로서 목도하게 되는 죽음은 차치하더라도, 정해진 과정이다. 아무런 병이나 사고를 겪지 않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열심히 착하게 살더라도 죽는다. 그리고 그 확정성만큼이나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거대한 운명적 공포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 앞에 다가오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그 무게를 직시하며 살지 못한다. 정신적 부담이 너무 클뿐더러, 사실 체감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알기도 힘들다. 또한 현실 세상에 ‘인생 2회차’ 같은 건 없으니 죽음을 마주한 순간 깨달은 것을 다시 곱씹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사치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대리체험(?)을 하고 싶다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권한다.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이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정말 숨이 꼴딱 넘어가는 순간까지 다룬다)을 세밀하고도 냉철하게 그린 중단편 소설이다. 러시아에서 1886년 출간된 작품임에도 현실의 우리에게 와 닿아 생생한 파문을 그리기에 충분한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이 죽음의 본질을 잘 꿰뚫는 설정과 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이 고위급 인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것이었다.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삶(죽음)에 주된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그의 시점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시간 구성을 역전해 초반부에 이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바라보는 타인, 친구, 가족의 감상을 현실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감성론에서 벗어나 그의 죽음이 사회 속에서 ‘소비’되는 양태를 날카롭게 그린다. 또한 이반 일리치와 그가 겪는 죽음 자체도 앞서 이야기한 보편성과 평등성, 운명성을 잘 드러낸다. 특별한 선인(善人)도 악인도 아닌 그는 뭔가 대단한 이유로 죽는 것이 아니다. 뚜렷이 이유도 책임도 당위도 알 수 없는 그의 죽음은, 다만 묵묵히 그러나 가장 큰 고통과 존재감으로 걸음을 떼 올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는 이반 일리치의 철저한 고독과 고통의 죽음 여정이 그의 생각과 절규, 의문과 깨달음으로 생생히 펼쳐진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 리가 없다. (…)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고통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대던 중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영혼의 목소리’와 마주한다. 평생 재판관으로 살았던 그가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판단해본 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임박해서였던 것이다. 정해진 대로, 사회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나름 탄탄대로를 걸으며 살아왔던 그는 죽음 곁에서 의미를 묻는 자신 영혼의 물음에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 삶의 진실을 비로소 되짚는다. 그런 그의 죽음 순간이 어떠했는지는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럼에도 아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을 때 어느 정도 괴리감이 따를 것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가장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느끼거나 사유를 통해 채워넣게 될 괴리의 지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벗어난 ‘내 몫’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