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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0

오래된 미래

Editor. 김정희


『오래된 미래 – 라다크에서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중앙북스

신라 시대, 충담사는 “백성이 먹고살 수 있게 하며, ‘이 땅을 버리고 내가 어디 가서 살겠는가’라고 되물을 정도가 되면 비로소 태평성대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임금은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한다면 나라는 가장 안정된 상태가 된다. 태평성대의 조건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 평화롭게 소통하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충돌하지 않고, 내가 사는 이 땅이 최고라고 여길 수 있는 유토피아. 고유한 전통문화 속의 라다크는 그런 유토피아와 흡사하다.
라다크에는 안분지족 속에서 누리는 안빈낙도의 삶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 소유한 자연물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며 자급자족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으며 만족했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며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생생하게 느꼈다. 갈등 상황에서도, 집
단 문화생활에서도 그들은 자발적 협업으로 빈틈없이 일을 해결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부당한 일이 생겨도 그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럴 수’있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누리는 삶의 기쁨은 당연한 결과였다. 있는 그대로, ‘나다움’으로서 인정받고, 자신이 자기 삶의 중심에 있다는 자존감을 지닌 개인은 타인에 대해 넉넉한 관용을 지닐 수 있다. 그런 개인들이 구성원으로 있는 사회는 유토피아와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라다크에도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친다.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라다크의 변화는 창세기 신화를 연상시킨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유혹에 빠져 개발문화라는 선악과를 접하고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보를 욕망했다. 화폐가치를 중심으로 한 이분법적 가치관은 라다크와 같은 미개발 지역 사람들에게 열등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자본의 결핍을 인지한 자리에는 욕망이 똬리를 틀고,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보 문화를 쫓아간다. 너무 뒤처
졌다는듯이 급하게, 이제야 신세계를 만났다는 듯이 경이롭게. 그들이 진보를 접하게 됨으로써 얻게 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 고유의 전통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선은 진정 어떤 의미일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누리던 평화와 영원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먹은 선악과는 과연 재앙이기만 한 것일까.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결핍이 주는 평화를 얘기할 때, 그것은 진정 설득력이 있는가. 오히려 ‘가진 자’가 된 다음에도 지속할 수 있는 성숙한 평화의 길을 고민하는 것이 마땅할지 모른다.
여기서 김초엽의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떠올려 본다. 이 소설에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진실을 뒤쫓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갈등 없는 마을에서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행복에 의문을 품는 인물이 나온다. 그 마을에는 성인이 되면 지구 행성으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떠나는 사람에 비해 돌아오는 사람의 수는 적다. 도대체 왜? 지구에서 그들이 본 것은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 감정과 인간 군상이었다.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흩어져있지만, 그것을 극복해내려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있는 곳. 인물은 그런 지구로 향하며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야.”라고 말한다. 이 마을의 순례 의식은 라다크에 닥친 변화의 물결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선택은 라다크의 몫이지 않을까. 이전에 경험했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답습할 것인지, 아니면 진보를 껴안고 라다크만의 문화를 개척해나갈 것인지. 그것을 누가,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오래된 미래』의 후반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연 라다크의 문화는 어떻게 보다 성숙한 유토피아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듯이 과도기의 혼란을 겪는 것은 괴롭지만, 그 이후에 얻는 행복은 이전에 누리던 행복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여기서 뒤늦게나마 제목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에서 작가는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온고지신과 유사하다. 옛것을 익혀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보 문화를 경험한 라다크 사람 스스로 지역과 전통에 맞는 진보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매우 고무적으로 보인다. 물론 진보적 기술이 미흡하기에 일정 부분 선진 문화에 기대어 시작할 수 밖에 없다. 라다크의 고유문화를 지지하는 선진 문화는 기꺼이 문화 간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적절한 지원을 제공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본 위주의 무분별한 개발을 감행하여 각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시킨 데 대한 반성이자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보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