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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February, 2019

러시아 문학은 처음이세요?

Editor. 이희조

푸틴의 풀네임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입니다.

『대위의 딸』
알렉산드르 푸슈킨 지음, 열린책들 /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을유문화사

러시아 문학은 세계 문학사에서 아주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여러 문학의 거장이 러시아에서 나왔고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러시아 문학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분량이 너무 길어서 버겁다는 것부터 시작해 어렵고 지루하다, 풍경이나 상황 묘사가 장황하다 등등. 이런 러시아 문학을 조금 더 친숙하게 읽을 방법은 없을까?
분량이 길다는 악명(?)은 사실 특정 러시아 작가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대표적으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톨스토이),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스토옙스키) 등 너무 유명하지만 정작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대작들이 두 권이 넘어가는 초 장편소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에 어찌 긴 것만 있겠는가. 처음 흥미 가진 사람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편도 많다. 대표적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단편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솔제니친) 등이다.
다음은 어렵고 지루하다는 문제. 많은 이가 러시아 소설의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주인공에 이입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유 중 하나로 너무 길고 비슷비슷한 인물 이름을 꼽는다. 하지만 몇 가지만 알면 장벽을 낮출 수 있다. 여러 소설 제목에도 등장하듯, ‘이반’은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이다. 그러니 주인공 이름이 이반이라면 ‘불특정 러시아인을 표현하고 싶었구나’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다음이다. 러시아에는 성 말고도 중간 이름으로 ‘부칭’이라는 것이 있다. 부칭은 아버지 이름을 따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 이름이 미하일이라면 그 아들의 부칭은 ‘-ㅗ비치’를 붙여 미하일로비치, 딸은 ‘-ㅗ브나’를 붙여 미하일로브나가 된다. 그래서 미하일을 아버지로 둔 도스토옙스키의 풀네임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이며, 그의 아들은 표도로비치라는 부칭을 갖게 될 것이다. 자음으로 끝나지 않는 안드레이, 세르게이 같은 경우는 또 다른 공식을 붙여 만든다. ‘부칭을 빼고 부르면 되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러시아에서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이름과 함께 꼭 부칭을 붙이고, 친근해지기 전까지는 이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한다. 길고 비슷비슷한 이름이라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는 걸 알면 조금은 덜 낯설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러시아 문학을 하나의 ‘사건’으로 접근하면 조금 쉬워진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비러시아인에게 ‘러시아 문학’은 100~200년 전에 활동했던 대여섯 명의 작가를 통칭하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 작가는 모두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걸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이들은 모두 시대가 만들어낸 천재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는 ‘차르’라 불리는 황제 정권이 통치하던 강력한 전제주의 국가였다. 니콜라이 1세로 대표되는 차르 정권에서 많은 러시아 지식인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작품 검열, 정치적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통받던 당대 문학가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결국 비정상적인 속도로 서구 국가들이 이루었던 문화 수준을 달성해버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의 혼란과 탄압 속에서 조선의 많은 지식인 및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의 비애를 표현해냈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쓴 윤동주의 고뇌를 설명하려면 그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차르 정권은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지 않았느냐고? 제정 러시아를 몰아내고 세워진 소비에트 공산주의 정권이 예술을 더욱더 정치적 수단으로 둔갑시켜 문학의 전통을 끊어버렸다는 아픈 얘기는 오늘은 하지 않겠다. 아무튼, 결국 우리 같은 비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러시아 문학은 20세기 초에 이미 완성되고 종결된 사건이 되어버렸다.
이제 러시아 문학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생겼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푸슈킨의 『대위의 딸』을 집어볼 것을 추천한다. 겉으로는 제정 러시아의 청년 장교가 대위의 딸에게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 흥미진진하고, 안에는 타락한 제정에 대한 비판과 당시 지방에서 들고 일어났던 농민 반란군에 대한 교묘하고 은근한 연대가 담겨 있어 속 시원한 맛도 있다. 푸슈킨은 또 누구냐고? 화장실에서든 어디서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시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시를 쓴 사람이 바로 푸슈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