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August, 2015

홀로 나는 시간

Editor. 박소정

누구에게나 혼자만의 시간이 있다. 잠들기 전, 출퇴근 시간, 그리고 예고치 않은 이별 후에 맞는 주말. 사람들은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낸다. 그러나그 시간을 맛있는 음식을 즐기듯 누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오히려 개구리가 혹독한 겨울을 이기기 위해 땅속에서 깊은 잠을 자듯, 그렇게 흘려 보내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에만 익숙해진 상태에서 불쑥 주어진 공백은 그저 버텨야 하는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고독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자는 신이 아니면 야수” 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홀로 있는 시간을 온전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떻게보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큰 아픔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하며 혼자 일어서는 모습, 사소하게 지나쳐버리는 시간을 기록해 새로운 예술의 영역에 다가가는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자유를 고독으로만 오독했던 지난 날을 반성한다. 그리고 홀로 자유로운 세상을 그려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지음
지식너머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과 같은 무계획의 시간은 그것이 단 몇 분이든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럴 때를 대비하며 킬링타임용 노하우를 몇 가지씩 상비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따라잡기, SNS로 지인의 안부 넘보기, 단순해서 더욱 치명적인 스마트폰 게임 등 각양각색이다. 말 그대로 시간을 애써 외면하거나 죽이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도 존재한다. 소위 ‘멍 때리는 시간’으로 불리는 이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공상에 빠지거나 자신의 습관적 행동에 몰두하는 시간이다. 저자는 발전을 업으로 삼은 인류에게 중요하지 않은 시간으로 분류되어왔던 무위의 시간에 대하여 탐구하고있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4분의 3 이상을 공상으로 보낸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꽤 많은 시간을 공상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유년기는 온통공상으로 가득했다고 고백한다. 꽃무늬 카페, 피아노 위의 액자들, 할머니들이 피우는 담배 냄새 같은 것들이, 그리고 글을 깨우치면서는 상점 간판, 광고에 나오는 단어들까지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주요 재료가 되었다. 공상을 누리는 것은 비단 창작 세계에서 일하는 자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로부터 특별한 공상은 북유럽 전역에 존재했던 ‘황혼의 의식’이라고 불리는 전통 풍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아름다운 황혼녘 즈음에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 한곳에 빙 둘러앉아 어둠을 맞으며 각자 고요하게 상념에 잠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로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채운 것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매일의 연속이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놓아버릴 수 없는 정신적 압박 속에 그 시간을 꺼려하고 외면하려 한다. 불안과 걱정거리들로 가득한 공상이 머리를 채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우기보다 채우기에 연연한 채 여전히 새로운 놀이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지도 모르겠다.

『도토리 자매』 태이 외 8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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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 목사가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미등록 사무실을 마련하고 인턴 직원을 고용해 조직적인 댓글 작업을 벌인 일명 십알단 사건이 있었다. 여기서 ‘십알단’은 무슨 의미인지 아래 보기에서 골라라. (1점)
① ‘십덕후 알러뷰 응원단’의 줄임말
② ‘십자군 알바단’의 줄임말
③ ‘십장생 알짜 군단’의 줄임말
④ SAT(암호 ‘함정 개조 팀’의 영어 ‘Ship Alternation Team’)의 한국식 이니셜 —‘부정선거 고사 문제지’ 중
대한민국의 부정선거는 끈질긴 역사와 보편성을 자랑한다. 마치 길모퉁이를 돌면 등장하는 보도블럭 공사처럼 흔하고 잦아서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 됐다. 다행히 그리고 시기 적절하게 이런 책이 나왔다.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 이 책은 건국 이래 자행된 부정선거의 사례와 기법, 인물을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 3.15 부정선거부터 최근 국정원 대선 개입까지, 1956년 ‘정읍 환표 사건’을 폭로한 박재표 순경부터 2012년 대선 직전 사이버 여론전에 뛰어들어 지난 5월 유죄판결을 받은 이태하 전 심리전단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피아노표’ ‘쌍가락지표’ ‘다리미표’ 등 이름부터 깜찍한 부정선거 기법들을 ‘에센스’만 모은 짤막한 장들로 구성했다. 일목요연한 편집, 사용설명서에 나올 법한 일러스트, 손바닥만 한 판형은 프로파간다에서 나온 다른 책들과 일관되게 실용성과 단순미를 지닌다.
이 책은 제목대로 요점만 모아놓은 참고서만치 건조하고 무뚝뚝한 체로 쓰였다. 책 후반에는 학습을 도울 4지선 다형의 ‘부정선거 고사 문제지’가 등장한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발칙, 통쾌한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패기와 유희만으로 수식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책을 만드는 것이 패기를 필요로 한 일로 여겨지는 현재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책의 목적이 아닐까. 이 책은 또 외면할 수 없는 과제를 독자에게 할당한다. 책의 끄트머리에 달하면 부정선거의 일시, 장소,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노트와 신고전화번호를 제공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겠나. 알았으면 실천하라는 뜻일 테지.

『침대 맡에서 옮긴 말들』 태이 외 8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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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를 영국에서 보낸 내게 한국은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다. 변두리의 양옥과 교외의 비닐하우스, 양철지붕이 흉물스러웠고 도심에서 인상적인 거라곤 난폭운전을 일삼는 버스와 택시들이었다. 심지어 한글폰트로 이루어진 간판도 어느 것 하나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없고, 복잡하고 어려운 존댓말 체계가 불편해서 한글이 열등한 언어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내게 한국은 총체적으로 촌스럽고 시대역행적이며 부끄러운 곳이었다. 물건에 비유하자면 ‘새마을 운동’이 쓰인 초록색 모자와 탐욕스러운 복부인이 들고 다닐법한 인조 악어가죽 가방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국이 무조건 미웠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열등감이라는 걸 자각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연히 정기용 선생과 한창기 선생의 책을 보게 된 후 ‘통으로’ 미워했던 한국이 새롭게 보였다.
정기용의 『감응의 건축』은 부끄럽게 생각하던 한국 시골에 대한 생각을 바꿔놨다. 아니,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전환시켰다. 그가 무주에 내려가 공공건축물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10년 동안을 정리한 책이다. 정기용은 무주의 마을회관, 박물관, 천문대, 납골당, 버스정류장 등 30여 개의 공공공간을 짓고 개선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무주의 자연과 지난했던 역사를 거치며 해체되고 붕괴되고 있는 시골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저자는 근대화에 동원됐지만 결과적으로 소외되어 온 시골과 남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 할 것인지, 더 중요하게는 그들의 자기부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는 현대의 건축가가 ‘소셜 코디네이터(사회적 조정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소셜 코디네이터로서 지역주민들과 교류하며 건축가나 행정가가 보지 못하는,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했다. 그렇게 해서 공중목욕탕이 있는 면사무소를 짓고 사람들이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버스 정류장을 짓는다. 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얻은 것은 이런 정기용의 태도였다. 촌스럽고 시대역행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들, 실로 일면 그러한 것들이라도 거기에 삶이 항상 존재해왔고 위대하든 불행하든 그만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매순간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객쩍어 보이는 어느 무엇 하나 하찮게 바라볼 수 없다. 이것이 예쁜 구석 하나 없던 이 도시를 궁금해하고 그러다 좋아하게 된 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