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October, 2015

미래에서 온 편지

Editor. 박소정

매주 새로운 어르신들을 찾아가 그들의 인생이야기를 담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반세기는 먼저 세상을 겪은 그들에게 나는 물었다.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느냐”고. 대부분은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어떤 분들은 “살다 보면 다 살게 된다”며 거칠고도 따스한 손으로 나의 손을 보듬어주셨다.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렸지만, 가끔 그들이 고단한 세월을 겪은 후에도 넉넉한 웃음과 품을 내어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힘이 되곤 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하루를 살아낼 때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는 책들이 있다. 내가 살지 않았던 까마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리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내다본다.

『런던통신1931-1935』 버트런드 러셀 지음
사회평론

경험에서 진정으로 무언가를 배우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과학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태도가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열린 마음은 과학적 기질의 정수다. 경험에 바탕을 둔 과학은 경험을 계측할 수 있게 해주고, ‘소싯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해준다. —본문중
20세기의 철학자, 수학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필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대표 지성인으로 불렸던 버트런드 러셀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 중 135편을 한데 모은 것으로, 당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결국은 자유, 개성, 사랑, 부모와 자식 관계, 진리, 교육 등 어느 시대나 관통할 만한 것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을 감지하면서 대중들에게 희망과 정확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써내려가며, ‘교육하는 여성의 립스틱 색깔’ 같은 가벼운 문제에서 모순적인 사회구조 문제를 찾아내고, 진보와 보수를 얘기하면서도 잰 체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위트를 섞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국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을 세우는 등 영국 정치사에 주요 업적을 남긴 그는 그의 칼럼 ‘경험에서 배워야 하는 것’에서 세상의 정부를 장악하는 것은 수십 년간 세상을 겪어온 노인들인데, 이들이 경험에서 배운 것은 경험하기 전부터 이미 믿어왔던 것을 고수하여 자신의 선입견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면에서 전통이 긴 서유럽의 나라들이 축적된 경험의 가치, 즉 지나치게 전통을 강요하는 측면에서는 자유로운 미국이 훨씬 나을 것이라 단언한다.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중앙Books

당신이 태어난 위대한 유럽에는 자유의 나라들이 번성하고 있지요. 물질의 풍요와 산업과 기술 모두를 가지고 있지요. 그곳의 세속의 기쁨이 더 크고 분주한 생활도 더 많겠지요. 과학도 문학도 그리고 모든 일들이 더 많이 변하고 있겠지요.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 우리에겐 기쁘고 평온한 마음이 있어요. —본문 중
햇빛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 그들을 보면 동정마저 들지 모른다. 하지만 복잡한 세상의 시름 따위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다는 듯이 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절로 겸손함과 의아함을 들게 만든다. 논문을 준비하던 저자 헬레나 호지는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를 방문한다. 거대한 산맥들로 둘러싸여 있는 ‘산길의 땅’ 라다크는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자원이 부족하다. 수세기 동안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동안 라다크는 그 영향권에서 독립해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해왔다. 처음에 그들의 언어와 생활방식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던 저자는 그들이 언제나 평온하고 따뜻한 웃음을 짓는다는 것에 매료되어 그들의 가치관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라다크 주민들은 서류를 작성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를 보며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스트레스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거나 조금 화가 날 만한 일에도 전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라다크인들은 자신이 스스로 훨씬 더 거대한 세계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넓은 생각을 지녔으며, 주변의 환경과 자신은 하나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탓하긴커녕 부족한 환경에도 감사해한다. 저자는 이러한 건강한 가치관의 바탕에는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자신의 일처럼 나누는 깊은 유대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나가며 인간이 소외당하는 오늘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가장 사소한 구원』 라종일, 김현진 지음
알마

엘리트코스를 밟아 상위 1%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전 외교관이자 현 한양대 석좌교수 라종일과 10대에 쓴 『네 멋대로 해라』 이후로 열정 넘치는 비정규직 글 노동자로 살아가는 김현진 작가가 주고받은 서른두 통의 편지를 옮겨놓은 책이다. 삶의 공통분모라고는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는 세대를 거쳐도 여전한 삶의 공통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으며, 세월의 깊이만큼 쌓아올려진 교수의 답변에서 위로와 잊고 살았던 삶의 방향을 되찾는다.
삶이 왜 이리도 고통스러운 것이냐고 묻는 젊은 작가에게 라 교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믿기 어려운 것을 믿어야 하는’ ‘참기 힘든 일을 참아야 하는’ 것들이 많아서인 것 같다”며 현실의 민낯을 마주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누구도, 적어도 에덴의 낙원 이후에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리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고 어른으로서의 조언을 덧붙인다. 비교적 평탄하게 일류의 삶을 살아왔을 것 같은 어른이지만, 그 역시 1950~1960년대 다사다난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겪고 매번 부닥치는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고 끊임없이 일어섰던 젊은이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유명 강사가 강연이나 책을 통해 ‘그런 문제에는 이렇게 대처해라’는 식의 인생 처세술을 전하며 감히 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멘토를 기대했다면 이 책은 실망만을 안겨줄지 모른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탄치 못하게 만들어왔다’며 누구에게도 고백하기 힘든 개인의 일들을 고백하는 작가에게 노교수는 일단은 괜찮다는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편협함을 천천히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결국은 본인이 해결해나갈 뿐 자신은 언제나 뒤에서 응원을 해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며 분주했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