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18

만화책을 추천하는 마음

Editor. 박중현

『WATCHMEN』에 대한 불친절하고 사적인 한 마디.
“볼만한 만화책 없나? 하고 봤다간 후회합니다.”

『WATCHMEN』 1, 2』 앨런 무어 글
데이브 기본즈 그림
시공사

본 꼭지에서 책을 선택하는 마음은 사실 그리 불친절하지 못하다. ‘내걸고 있는 불친절함에 부응해야 해!’라는 사명감도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 대부분 책 추천 형식을 띤다. 물론 세상엔 좋은 책만큼이나 별로인 책도 많기 때문에 ‘이 책은 걸러’ 혹은 ‘이 책이 어쩌다 지금 화제긴 하지만 별로야, 속지마!’라는 얘기도 아주 유의미하지만, 정말 웬만한 사회악이 아닌 이상 ‘결국은 취향 문제’라는 널널한 마지노선을 좀체 돌파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지만 그 진가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취향은 좀 탈 것 같)은 책을 소개하는 편이 독자와 작가와 편집자와 출판사와 서점과 종이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라는 것이 본 꼭지에서 책을 선택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시원스레 ‘불친절한 데다가 사적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건 내 취향과 글솜씨뿐인 것이다. 어째 좀 슬퍼졌지만, 좌우지간 뜬금 고백을 늘어놓은 것은 만화책으로 선뜻 무얼 고를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막상 추천하자니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책들은 “야, 요새 만화책 뭐 재밌냐?”라는 친구 물음에나 답할 만한, 충분히 대중적이거나 개인적이어서 소개하기 멋쩍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만화책 추천은 “그냥 봐, ‘매우’ 재밌어”라든지 “너 ○○랑 ◇◇ 좋아한댔지? 그럼 봐, 후회 안 함” 같은 고객 맞춤 쌈박 큐레이션이 심금을 울리는 법인데!)
선택의 시선은 그렇게 반사적인(?) 개인 취향에서 벗어났고, 마침내 손에 든 것이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역작 『왓치맨
WATCHMEN』이다. ‘그래픽 노블’에 대한 정의는 흔히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 정도로 알려져 있다. 보충하자면 서사적으로는 소설에 비견할 만큼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띠며, 회화적으로는 영화를 떠올릴 만큼 섬세한 작화와 연출을 보여주는 만화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연재 형식을 띠는 대부분 만화와 달리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더 튼튼한 제본 형식을 갖춰 출간된다는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그래픽 노블이나 앨런 무어에 관해 특별히 관심 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옛날에 히어로 무비인 것 같긴 한데 이야기며 색감이며 인물들 정신 상태며 사회 배경까지 모조리 어두침침하며 묘하게 현실적이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끝까지 보게 된 영화 <왓치맨>(2009)이 떠오른 덕이었다. 그 원작이 바로 『왓치맨』이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작품의 특징은 추천하는 이유와 추천하기 조심스러운 이유를 포괄한다.
Who watches the watchmen?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크게 이야기와 표현(연출)이다. 『왓치맨』은 마블이나 DC 작품 같은 호쾌하고 감동스러운 히어로물이 아니다. 히어로(왓치맨)라는 ‘가상의 자경단’만 빌려왔을 뿐 감싸고 있는 시대 사회적 배경이나 현실 감각은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연상할 만큼 핍진하다. 독서경험에서 역시 흔히 만화책에 기대하는 ‘즉각적인 쾌락’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진도가 쉬이 나가지 않는다. 장단점을 떠나서, 관성적인 리듬으로 휙휙 읽을 수 있는 일반 만화책 독서 경험과는 다르다. 부득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의미 있기 때문이다. 대사나 그림의 암시나 복선, 상징은 기본이고, 단 한 컷도 그저 이야기의 전개로 소모되지 않는다. 주·조연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물이 스토리에 참여하고 변화하고 반응한다. 물건도 마찬가지이며 때론 인물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컷의 크기나 해당 페이지에서의 구성, 효과음이나 주목선, 인물의 감정이나 성향에 따른 말풍선 표현 디테일 역시 단순한 도구적 층위 이상을 표현한다.
정리하자면 휙휙 읽히지도 않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를 바로바로 주지도 않고 ‘이야기’에 흔히 기대하는 시원한 맛도 없다. 다만 이러한 일반적인 기준 이면이 가리키는 재미와 가치에 관심 간다면, 그리고 기어코 이 책을 집어 든다면 말해줄 수는 있다. 한동안 당신의 시간은 왓치맨을 읽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으로 나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