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21

손수건을 건네며 듣다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애틋한 사물들』
정영민 지음
남해의봄날

미국에 사는 언니와 한 카페에 올라온 글을 화제 삼아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한 번씩 한국을 다녀가는 교포들은 한국이 참 살기 좋다고 감탄을 하곤 하는데, 어떤 사람이 한국 거리에는 장애인이 잘 안 보인다는 글을 남겼단다. 그리고 거기 눈에 띄는댓글 하나 달렸다고 했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왜 밖으로 나오지 못할까요?’로 시작하는 댓글의 요지는 장애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눈총 때문에 나다닐 엄두를 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장애인이 거리를 활보하는 게 일상인데, 한국에서는 ‘몸도 불편한데 어딜 돌아다녀’라는 사회의 인식이 그들을 짓누르는 게 아니냐는 탄식을 주고받았다. 문득 샌프란시스코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버스에 같이 올랐던 장면이 떠올랐다. 동행도 없이 혼자 길을 나선 그가 얼마나 천천히, 자연스럽게 기사의 도움을 얻어 버스에 오르내렸는지 기억한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뇌병변장애는 ‘뇌의 손상으로 인한 복합적인 외부 신체기능의 장애’를 일컫는다. 뇌병변 부위에 따라 상하지의 마비, 관절의 경직, 불수의적 운동, 균형감각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내가 어릴 적에는 뇌성마비나 중풍이라 부르던 장애다. 그땐 학교나 길거리에서 뇌성마비로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누군가를 마주치곤 했다. 그런데 사람이 훨씬 많은 더 큰 도시에 살고 있는 지금은 그런 이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애틋한 사물들』을 통해 뇌병변 장애를 가진 한 개인의 담담한 절규를 들었다. 작가의 장애는 기질적인 것이라 그의 책임이 아니었지만 홀로 슬픔을 견뎠고, 살기 위해 극기를 익혔지만 결국 혼자만의 외로운 사투였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삶의 기록이다. 비장애인인 내가 별다른 생각없이 다루던 사물들이 작가에게는 극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인지 그의 사유엔 극기, 견딤, 반복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작은 단추도 그에게는 쉬운 사물이 아니었다. 단추를 혼자끼우기 위해 그는 극기의 순간을 지난다. 시도와 실패 뒤에는 당연히 성공과 성장이 자리한다는 기대가 그에게는 없다. 그의 성장은 스스로를 단련해야만 얻을 수 있는, 언젠가는 만날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끝이 없는 도전 과정 자체였다. 식판 또한 그에게는 곤혹스러움과 절망을 주었다. 그는 식판을 든 채로 쉽게 움직이지 못해 타인의 식사를 지체시킬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천천히 먹어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 숟가락을 놓게 되는데, 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이 자신의 식사를 대신 받아주고 자신은 먼저 자리를 맡는 방식으로 공존한다. 무수한 반복을 견디며 얻는 일상을 살아내는 내공, 그 틈에 끼어드는 작은 기적들은 그의 움직임을 조금씩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곤혹과 두려움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일부’로 여기기로 한다. 시소가 기울어짐을 주고받아야 시소다울 수 있듯이, “한 사람이 상승하면 다른 한 사람은 하강하는 것, 그것이 평등일지도 모른다”라고 그는 말한다.
작가의 사유에 깊이깊이 공감하며 이 책을 읽었다. 밑줄 그은 부분이 너무 많아 책을 다시 사야 하나 싶을 정도다. 여느 독서와 달리 이 책을 통해 나를 확인하기보다는 작가라는 한사람을 온전히 본 것 같다. 이렇게 삶을 견디며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담담히 주억거리게 되는 감상의 근저에는 위로의 마음이 있었던 듯하다. 그가 “여전히 어떤 행위가 인간적이고 당신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다시 손수건을 건넨다고 나직이 고백”했듯이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내게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의미였다. 그를 향한 위로이자, 나에게는 일종의 보험 같은 독서였다. 나 역시 마음이 힘들 때 단단한 마음들에 기대곤 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함께 동행해주면 좋겠다. 작가의 말마따나 어차피 보편적인 평등이란 없다. 서로 상승했다 하강하면서 “다른 속도, 다른 걸음, 다른 형식으로 제 나름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지도 못할 만큼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을 때, 비로소 서로 다른 우리는 공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는 장애를 가진 이들도 미소를 띤 채 만원 버스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