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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1

머릿수 25만

글.서예람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시간과 몸뚱이 하나뿐이라 믿고 살아온 빡빡한 사람. 갈수록 몸에 의해 시간이 많거나 적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그들의 삶, 주변이 궁금하다.


『어른이 되면』
장혜영 지음
시월

뇌에 관한 많은 책과 연구들이 인간의 능력과 한계, 그리고 그 추상적인 작용이 뇌의 어떤 지점에서 어떠한 화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답을 찾으려 한다. 이런 책들을 한참 살피다보니 어딘가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랍냐는 인간성에 대한 감탄과 찬사가 뇌과학 뒤에 메아리처럼 지겹도록 웅웅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뇌는 기본적으로 나의 모든 생존을 위해 몸을 운영하지만, 실험실 같은 깨끗하고 단순한 환경이 아닌, 복잡하고 치사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선택을 내린다. 뇌의 이러한 본질을 신경학에서는 ‘열린 시스템으로서의 뇌’라고 말한다. 뇌는 내가 세상에 발 딛고 사는 것을 돕는다.
뇌는 몸의 일부분이며, 뇌는 그 몸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행동한다. 그런데 그 뇌를 활용하는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만 생각하느라 세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잊는다. 나는 뇌과학의 성과를 활용해서 내 뇌를 슬기롭게 굴리게 되는 것이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개 생명체인 나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은 우리 각자의 머리보다 한참 넓은 세상 속에서 구성된다. 13살 때 부터 18년 동안 시설이라는 좁은 통제의 세상에서 살았던 발달장애인 혜정, 그리고 이런 동생과 함께 사회에서 살기로 한 ‘생각 많은 둘째 언니’ 혜영의 이야기는 어떤 한 사람의 뇌만 볼 때는 알 수 없었던 더 큰 변수, 세상을 보게 한다.
발달장애란 우리가 성장하면서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뇌의 일정한 발달 양상과 맞지 않는, 나이에 따라 기대되는 것보다 늦게 발달하는 뇌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2021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전체 인구 대비 등록된 장애인 인구는 5.1%, 그 장애인 인구 중 발달장애인은 약 9.4% 정도로, 25만 명 정도다. 구글에 ‘25만 명’이라고 검색하면 지난 5년간 신고된 가정폭력 사범 수(구속률은 0.8%에 불과하다는 내용이다), 남은 올해 정부가 창출하고자 하는 목표 일자리 수, 올해 추석 연휴에 제주도에 방문했던 사람들 수, 불과 몇 주 전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어린이 수, 강남모처의 아파트 청약을 위해 몰린 사람들 등의 뉴스가 나온다. 이 뉴스 제목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와 정부가 관심을 갖고 고려하는 인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머릿수 25만 명의 발달장애인은 셈해지지 않는다.
혜영은 계속해서 말한다. 시설과 세상에서 혜정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몸’으로만 취급되었다고. 그 말은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느낌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물 같은 존재처럼 간주되었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나 혜영은 동생을 시설에 보낸 자신의 부모와 시설에 있는 많은 장애인들의 보호자들을 감히 나무라지 않는다. 혜정이 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시설에서 살고 그곳의 법칙에 복종하도록 강요받은 상황, 즉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보호자들은 막다른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의 친구들을 제외한 어떤 기관도, 심지어 나라조차도 발달장애인과 함께 사는 그를 성의껏, 끝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장애인의 돌봄과생계는 오롯이 그 보호자, 가족의 책임으로 남겨졌다.
시설을 나와 사회에서 살았더니 기적처럼 동생의 뇌가 좋아졌으며 세상은 살만한 곳이더라는 헛꿈 같은 이야기는 전혀 없다. 다만 혜영과 혜정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혜정은 밖에 나와 산 뒤로 의사 표시를 전보다 주저 않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혜정은 여전히 많은 일을 하는데 있어 남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혜정은 자신의 리듬대로 새로운 규칙을 알아가고, 합의하고,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하고 싶은 일들도 해나간다. 쉽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것, 가능하면 세상을 바꾸려고 애써보는 것이 어떤 뇌를 갖기 위해 훈련하는 것보다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25만 명의 발달장애인, 그리고 고려되지 않는 더 많은 머릿수를 대표해 국회에서 일 인분을 담당하고 있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말을 인용하며, 이 자매를 응원해본다.
“즉 변화해야 하는 것은 나와 혜정이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이미 혜정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혜정이의 몸뿐만 아니라 혜정이의 이름과 이야기를 이 세상에 돌려놓고 싶었다. 삶은 몸에만 깃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삶이 새로운 이야기가 될 때 세상은 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