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인터뷰
‘화해의 악수’를 청하다, 소설가 조규미
에디터: 유대란, 사진 제공: 김종우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들은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인생에서 힘들고 불안정했던 시간과 관련이 있다. 당시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힘들었던 시간은 삶에 뚜렷한 길을 내고 내면과 마주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5편의 단편을 엮은 『옥상에서 10분만』은 이런 순간이 한창 진행 중인 10대들의 세계를 통해 성숙과 변화의 길목에서 때로 다치고 미끄러지는 모두를 어루만진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조규미 작가에게 요즘의 아이들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학창 시절 책과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창작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고 그림책과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면서 제가 모르던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제가 어릴 때는 접할 수 있는 책의 종류가 세계의 명작이라든지, 고전 문학 전집이라든지 이런 것들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요즘의 창작 동화나 소설들이 어른인 제가 봐도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글을 써보고 싶었고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아이의 이야기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앞으로도 동화와 청소년 문학을 계속 쓸 생각이에요. 저는 청소년 단편으로 데뷔한 뒤 장편 동화로 책을 냈고요. 동화와 청소년 문학을 함께 쓰시는 분들이 꽤 많아요. 김려령 씨, 황선미 씨, 김혜정 씨 등.
‘리디북스 SF길라잡이’였던 것 같은데, 어느 기획자분이 정세랑이 가장 가볍고 쉬우니까 여기서 시작해서 넘어가라고 순서를 정해주신 게 있었어요. 제 소설이 입문자용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수도 있는 건데, 별로 기분이 안 나쁜 거예요. 전 좀 가벼운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일부러 쉬운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작가는 쓸 수 있는 걸 쓰는 거고, 제 거에서 시작해서 좀 더 정교하고, 어려운 글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 입구에서 깔때기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왜 문학이 종교인 작가들이 있잖아요. 문학은 숭고한 일이고 절체절명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그런 편이 아니거든요. 저는 문학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하고, 힘을 주고 쓰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 평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아무래도 아이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가장 먼저 쓴 건 2011년에 썼어요. 당시 큰 아이가 중3이었는데, 아이가 중고등 시기를 보내는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근간으로 총 5편의 단편을 완성했어요.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하는 이야기들,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파편들을 소재 삼아서 거기에 살을 붙였어요. 소재 선택을 하면서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에 부합되는지,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현실성을 얼마나 담보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었어요.
제가 중2인 둘째 딸에게 도대체 중2병이 뭐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씨익 웃더니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내 안에 흑염룡이 살고 있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게 뭐냐고 했더니 검은 불을 내뿜는 용이래요. 무슨 만화의 패러디더라고요.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는 거죠. 그런데 아마 모든 세대가 마찬가지겠지만, 아이들이 생각하는 세계와, 어른들이 아이들을 넣고 싶어 하는 세계는 다른 모양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대학’이라는 목적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잖아요. 그런데 대학만 가면 다 된다는 그 견고하던 신화는 이미 무너지고 있어요. 아마 아이들 중에는 그걸 어른보다 먼저 깨닫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거고, 당장 알지 못하는 아이들도 차츰 알게 되겠죠. 그래서 ‘어, 이거 아닌데’, ‘어른들이 왜 그랬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것 같아요.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서로 부딪히지 않게 피해준대요. 큰 나무가 지나치게 가지를 뻗으면 어린나무의 가지는 그만큼 뻗어 나갈 공간이 없어지죠. 어른이 자기 가지에 맞게 아이들을 재단하려는 건 아닐까, 비켜줘야 할 때 비켜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소한 예를 들어, 요즘 아이들이 화장을 일찍부터 하잖아요. 그게 제 눈엔 막 예뻐 보이지는 않아요. 화장을 안 해도 충분히 예쁘고 피부도 너무 좋은데 굳이 왜 하는지 안타까움 때문에요. 그런데 말이죠, 아이들이 화장을 하는 건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어른의 입장에서는 화장 안 한 얼굴이 순수하고 예뻐 보일 수 있지만, 그건 어른의 기준일 뿐이죠. 아이들은 화장을 해서 예뻐 보인다고 생각하고, 또래에게 예뻐 보인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죠. 순수함, 깨끗함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바라고, 때로 강요하는 이미지예요. 물론 저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순수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 원하는 이미지를 인정해줘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청소년들이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아요. 얻는 게 있다면 더 좋고요. 그렇다고 청소년만 읽으라는 법은 없어요.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작품은 교과서에 실렸지만, ‘청소년 문학’이라고만 불리지 않잖아요. 기존 문학 작품인데 청소년들이 읽을 만하다 판단해서 교과서에 실린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영 어덜트’라고 불리는 부문이 있어요. 『트와일라잇』이나 『헝거게임』이 거기에 속해요. 쉽게 이해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청소년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이 본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완득이』 같은 작품이 그렇죠. 현재 청소년 문학에 대한 여러 논의가 오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것에 대해 특별히 공부해본 적은 없어요. 문학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그렇듯 계속 변화하는 생물처럼 어떤 의미를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청소년 문학을 표방하든 하지 않든 계속 작품이 탄생하고 독자들이 의미나 특징을 형성해갈 거로 생각해요. 그 속에서 다양성이 만들어지겠죠. 건전성의 문제도 이런 큰 흐름 속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이런 문학이 성장을 아직 완료하지 않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문학이 아닐까 해요. 미성숙하다는 뜻이 아니라, 비교적 여린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너무 깊은 충격은 이런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를 받음으로써 인간은 성장하잖아요. 하지만 그 정도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