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 2017

운명과 선택

Editor. 김지영

정도를 막론하면 일주일 중 나흘은 술과 함께한다.
술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행복해진다.
가끔 내 주업이 에디터인지 프로알코올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루살카 저주의 기록』 에리카 스와일러 지음
박하

운명은 가끔 장난을 친다. 지하철에서 헤어진 남자친구를 만나게 하거나 음식점에서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게 하는 등 달갑지 않거나 달가운 상황을 연출한다. 내 경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라는 생각이 드는 달갑지 않은 만남이 대부분이었다. 우연은 부드럽지만 운명은 강압적이다. 운명은 발목이 끈으로 묶여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라서, 청개구리 기질이 툭 튀어나온달까. 『루살카 저주의 기록』은 제목만 읽어도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는 확신이 서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건 화자인 사이먼이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엄마의 자살이라는 가슴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사이먼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동생 에놀라를 기다리며 낡은 집을 지킨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먼 앞으로 오래된 책이 배달된다. 사이먼은 그 책을 읽고 자신의 가족에게 대물림 되는 저주가 있고, 그 저주의 내용이 집안 여자들의 자살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이먼은 죽음을 ‘운명’이라 말하는 책에 반기를 든다. 그는 운명으로부터 에놀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바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역할을 맡은 건 (굳이 하나만 뽑자면) ‘오래되고 낡은 집’이다. 집은 한 가족이 사는 공간으로, 그 의미에서 이미 가정을 내포하고 있다. 소설에서 집은 가정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 오래되고 낡은 집은 사이먼과 에놀라의 가족이 살았던 곳, 엄마가 자살하기 전 삶은 달걀을 아침으로 먹게 한 곳, 아버지가 천천히 죽은 곳, 사이먼에게 딱 하나 남은 가족인 에놀라가 돌아올 곳이다. 낡은 집은 에놀라와 사이먼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빠른 속도로 무너진다.
“집이 저를 공격했어요.”
처음 에놀라와의 다툼이 있었을 때 바닥이 꺼지면서 사이먼의 다리를 삼켰다. 절뚝거릴 정도로 크게 다친 사이먼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프랭크에게 집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말한다. 결국 사이먼을 망가뜨리는 건 가정이고, 그를 고통으로 이끄는 것도 가족이다.
“그건 잘못된 믿음이야. 오빠가 그런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니까 그렇게 믿게 되는 거야. 오빠 혼자 너무 오랫동안 그 집에 살았어.”
동생인 에놀라와 싸우는 시발점이 되는 집은 언제나 남매에게 걸림돌이다. 계속되는 불행, 멈추지 않는 싸움, 밝혀지는 가족의 그림자 때문에 이들이 저주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삶을 단념하는 건 아니다.
“운명은 우리를 선택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이 책을 옮긴이는 소설을 이렇게 해석했다. 사이먼와 에놀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은 모두 운명처럼 이끌려 인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사이먼과 에놀라는 그 운명을 스스로 바꿨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이먼은 저주가 내려오는 외가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남성이라는 점이다. 이미 몇백 년간 여자아이만 태어났던 집안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 부분에서부터 이미 사이먼은 운명을 바꿀 유일한 열쇠였다.
운명의 장난이라 속단하지 말고, 남들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귀 기울이지 말고, 주어진 운명에 고개 숙이지 말라는 저자의 메시지는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라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천천히 드러나는 충격적인 이야기는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임을 꼭 명심하고 읽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대략 600쪽이나 되지만 이야기의 전반부부터 촘촘히 복선이 깔려있어 자칫하면 스포일러가 될까 봐 염려됐다.
소설을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장까지 꼭 봐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