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19
심슨 가족과 철학
Editor. 김지영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샌들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고 있노라면 자유롭기 짝이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ASMR이 인기를 얻기도 전부터 매일 밤 이 애니메이션을 틀어 놓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십 년 가까이 매일 밤 봤으니 유행어나 명대사가 나오면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애니메이션이야 30년 동안 방영했고 영화 <심슨 더 무비>가 극장에 올랐지만, 국내 출판 시장에 메이킹북이나 아트북이 출간되지 않아 ‘이것이 블루오션인가’ 싶었다. 관련 도서가 전무했던 건 아니다. 2014년 윤출판에서 나온 『심슨 가족에 숨겨진 수학의 비밀』은 수학에 영 관심 없던 터라 읽을 생각이 없었고, 작년 클에서 <심슨 가족>의 작가인 조엘 H. 코언의 마라톤 도전기인 『마라톤에서 지는 법』이 나와 책을 사기 위해 서점까지 갔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라 도로 내려놨다. 그러다 폭스를 디즈니가 매각하면서 사실상 시즌 30으로 <심슨 가족>의 종영이 확정됐다. (최근 두 시즌을 연장하기로 했다.) 대체로 인기가 있거나 오래 방영했던 프로그램이 막을 내리면 관련 도서가 나온다는 희망과 기대에 매달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발견했다. 드디어 나왔다. 읽을 만한 책이.
만화영화에 심오한 의미 따윈 없어. 싸구려 웃음을 선사할 뿐이라고! —호머 심슨
많은 철학자들이 의기투합해 쓴 『심슨 가족이 사는 법』의 원제는 ‘The Simpsons and Philosophy’로, 제목 그대로 <심슨 가족> 속 코미디를 뛰어넘는 철학적 의미를 찾아낸다. 철학의 눈으로 <심슨 가족>을 바라보는 책인 만큼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하지 않는다. 분량이 492장이나 되는데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 노자, 니체, 칸트 등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나 사상적 기초까지 설명했다면 『율리시스 』 버금가는 ‘벽돌책’이 탄생했으리라.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철학자나 사상은 잘 몰라도 읽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심슨 가족>을 모르거나 띄엄띄엄 본 사람이라면 당장 책 덮고 애니메이션부터 봐야 한다. 철학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애니메이션 장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잡이로 나오기 때문에 겉핥기도 안 된다.
<심슨 가족>에서는 가끔 예언 아닌 예언(대표적으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이 적중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팬들 사이에서는 철학적 의미를 찾거나 애니메이션 속 숨은 사회 풍자를 찾아내는 놀이가 계속되고 있다. 이를 우려한 저자들은 전문을 통해 이 책의 정체성을 확실히 밝힌다.
이 책은 ‘<심슨 가족>의 철학’이나 ‘철학으로서의 <심슨 가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슨 가족>과 철학’이다. (···) 그보다는 우리가 <심슨 가족>에서 본 철학적 의미를 조명한다. —「스프링필드에 대한 성찰?」 중
철학자들은 <심슨 가족>에서 어떤 철학적 사유를 끄집어냈을까? 심슨 세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인간성’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는 도덕성, 대중의 들끓는 반지성주의 등을 보여준다. 삶의 여건과 삶을 공유하는 사람, 경험의 자극 등을 통해 사람은 다양한 특성을 내면화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인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행동과 말을 보여주고, 환경이 바뀌면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가치관이다. 결국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이유도 가치관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자기방어, 자기표현이다. 스크루지 영감의 수십 배는 더 짠돌이에 악마만큼 악한 번즈 사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풀어낸 스프링필드의 캐릭터가 추구하는 가치와 인간성을 들여다보니 어째 그들에게서 현대인, 우리 사회가 보인다. 그래서 더욱더 이 책을 만화에 기반한 철학서로만 치부할 수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 하면 아무래도 번역이 아닐까 싶다. 번역자에 따라 원문을 번역하는 기준이 다르지만 팬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심슨 가족>은 수많은 유행어를 가진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어 더빙판에서도 몇몇 유행어를 한국어로 바꿔 팬들에게서 많은 원성을 샀었는데, “Do’h!”을 “뜨악!”이라고 바꾼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애니메이션은 워낙 예전부터 해오던 관습 때문으로 탓을 돌릴 수 있지만, 번역서에도 그 ‘말맛’을 살리지 않고 꾸역꾸역 한국어로 번역해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영문을 함께 병기한 것도 아니라서 처음 ”뜨악”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호머가 뜨악한 캐릭터라는 건가’ ‘호머가 뜨악한 일을 했다는 건가’ 등 무슨 소리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자고로 독서란 독자의 취향을 저격할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게 소재든, 작가든, 주제든 상관없다. 어쨌든 내 마음이 동해야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 이상 독서를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한 행위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마음이 가는 책이 있어야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책을 읽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내가 ‘휴가’ 동안은 책을 잠시 읽지 말자고 (만화책은 제외하자) 먹었던 마음을 돌려 단 한순간에 책과 북 커버를 동시 구매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