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anuary·February, 2019
세상 참 좋아졌다고요? 아닌데요
Editor. 최남연
불편하지만 필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상상력과 용기를 나누어요.
『82년생 김지영』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대통령에게 누가 선물했다고 하여, 인기 걸그룹 멤버가 읽었다고 하여, 또 얼마 전에는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여 출간 이래 내내 화제에 올랐다. 지난 11월에는 100만 부 판매를 기념해 5편의 평론과 작가 인터뷰를 담은 코멘터리 에디션이 나왔다.
『82년생 김지영』의 기록적인 판매 부수의 중심에는 수많은 여성의 공감이 있다. 바로 내 얘기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의 일생을 압축적이고 평균적으로 보여준다. 김지영의 어머니로부터 시작해 김지영 씨가 태어나고,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한 뒤 회사에 다니다 결혼하는 즈음까지의 시간 구석구석에 배치된 에피소드들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보았을, 혹은 주변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을 묘사하고 있다.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한다”는 학과장, “첫 손님으로 여자는 안 태우는데 태워준다”는 택시 기사, “내가 많이 도울게”라는 남편, 끝으로 (결말 스포일러지만 이미 유명하니 그냥 쓰자면)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는 정신과 의사 등이 김지영 씨를 거쳐 간다. 작가는 실제로 평균적인 여성의 삶을 포착하기 위해 인물과 가족 구성에 신경 썼다고 한다. 제목의 ‘82년’은 어머니 세대가 ‘여공’이 되어 남자 형제의 학비를 댔던 1970년대, 여아 낙태가 극심했던 1980년대, IMF가 닥쳤던 1997년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여성 혐오가 수면 위로 올라온 2000년대 등을 주인공이 고루 통과하게끔 고심 끝에 설정한 시점이다. 이 모든 시간을 통틀어 『82년생 김지영』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역사 속의, 그리고 일상 속의 ‘성차별’이다.
뜻만 풀어 쓰자면 성차별이란 단지 성별을 이유로 받는 다른 대우다. 인류 역사가 남성 중심임을 감안할 때 성차별이란 곧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불이익이 된다. 오빠, 동생보다 훨씬 똑똑한데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가지 못한 무수한 여성들, 부부가 함께 일하는데 여자여서 해고당해야만 했던 농협 직원들이 받았던 것은 모두 성차별이다. 신경숙의 『외딴 방』과 1999년 농협의 사내 부부 대상 구조조정 사례를 살펴보길 권한다. 다 옛날 얘기 아니냐고? 2017년 대한석탄공사, 한국가스안전공사에 이어 2018년 KEB하나은행, KB국민은행, 신한금융그룹에서 점수를 조작해 합격 기준에 미달하는 남성 지원자를 뽑고 합격했어야 하는 여성을 탈락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또, 지난 11월 UN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글로벌 임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36.7%다. 같은 일을 하는 남성이 100을 벌 때, 여성은 단지 여성이어서 약 64를 받는다. 어디 이뿐만인가. 여성 아르바이트생에게만 안경을 쓰지 말 것을 강요하는 모 영화관, 여성 출전 종목이 없는 연고전, 손님을 맞고 커피를 타야만 하는 여성 직원, ‘독박’ 육아 처지에 내몰린 어머니들 등등… 성차별에 다른 이유는 없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점이 이유가 된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그들 간의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성을 끊임없이 후려치고 내리깎는 것이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고 한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발화자는 누구인가. 나는 “살기가 좋아졌다”고 말하는 여성을 한 번도 본 적 없다. 2019년 1월, 우리는 여전히 “이게 나라냐”를 외친다. 성차별은 고용, 임금 등 공적 영역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매일 하는 생각, 판단, 기대, 행동 등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는 관행이자 습관이어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채기조차 어렵다. 반복되는 당연한 일상에 ‘왜?’를 묻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또 다들 그렇게 하니까, 어제와 같은 오늘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 관성을 깨고 담대한 물음표를 던진 책이 바로 『82년생 김지영』일 테다. 90년생 김지영은 태어나지도 못했다. 백말띠 해에 여자아이를 낳으면 드세다며 낙태율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2000년생 김지영은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된다. 2010년생 김지영은, 좋아진 세상에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