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August, 2016
세상을 바라보는 좌표
Editor. 유대란
몸에 나쁘고 후회가 예정된 일들에 투신한다.
소독차를 보면 쫓아가고 비 오는 날 나는 기름 냄새를 좋아한다.
위스키에 나물 안주를 먹을 때 행복하다.
아름다운 머릿결과 구릿빛 피부를 발광하며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사인을 보내는 표지모델에 혹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잡지를 고르기 전에 편집장의 글을 살펴보는 버릇을 들였다. 표지가 잡지의 얼굴이라면 편집장의 글은 매체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결정하고, 현재 처한 데가 어디쯤인지 통지하는 이정표와도 같다. 그 ‘어디쯤’은 잡지가 발 딛고 시대를 바라보는 곳의 좌표가 된다. 잡지는 취향 공동체적 성격이 강해서 이 좌표와 자신의 간격이 얼마간의 긴장감을 일으키는지 따져본 후 구독을 결정하면 실망할 일이 없다.
어떨 땐 그 글 자체가 ‘쓸데없이’ 멋있어서 그 일부만을 보기 위해 잡지를 구하기도 한다. 『GQ』의 이충걸 편집장, 『대학내일』의 전아론 편집장, 『배니티 페어』의 그레이든 카터, 그리고 『The New Inquiry』의 에디터 노트가 그렇다. 개성은 모두 다르다. 이충걸 편집장의 글은 시대에 조금은 편집증적으로 반응하는 말쑥한 도시 남자 같다. 전아론 편집장의 글은 사변적이고 미시적이며 편안하다. 이들의 반대편에, 선언적이고 논리적 배후를 촘촘히 깔아놓은 그레이든 카터의 글이 있고, 전투적인 자세로 최신의 지식 동향과 비판을 토해내는 『The New Inquiry』의 에디터 노트가 있다. 소개하려는 두 권의 책도 각기 남다른 좌표에서 세상을 바라본 두 편집장의 글을 엮은 것이다.
작고 가느다란 것들
한창기 선생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의 발행 편집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창간한 최초의 잡지는 1970년에 나온 『배움나무』다. 이 세 잡지를 중심으로 그가 쓴 글들을 엮어 『뿌리깊은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이 이번 세기에 출간됐다. 이 중 『배움나무의 생각』은 문화 시평이라 할 수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한창기 선생은 생전 글도 많이 썼지만 말도 많이 했는데,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좋아하면서도 식사 자리에서 나누기엔 버거운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같이 밥 먹기는 좀 피곤해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서릿발’ ‘나잇살’에는 왜 디귿, 지읒이 아닌 시옷이 쓰이며, 소나무는 소나무인데 홍송은 왜 홍송이며,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가느다란 것들을 궁리하고 글로 썼는데, 아마 그것들로부터 방해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언어의 문제부터, 미인 선발대회나 윗사람만이 시동을 걸 수 있는 악수의 룰 같은 것들이 그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흔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도 참 관심이 많았다. 노인의 얇아진 머리카락, 소와 사람의 인연 같은 것을 곰곰이 생각한 그였다.
당장 몰라도 죽지는 않지만, 알게 된 순간 머릿속 변화의 물꼬를 틀 만한 것들에 대한 그의 고찰과 논평은, ‘생각하기’에 대한 좋은 예다. 그것은 사회, 문화상의 세밀한 묘사이기도 해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볼 수 있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이래 우리는 매우 더디게 진보했다. 별로 차이가 없다. 큰 차이라면 한창기 선생이 더는 여기 없다는 사실뿐.
예술은 아직 우리를 떨리게 하는가
남성지를 남성만 본다는 건 편견이지만, 미술전문지를 미술인만 본다는 건 정확한 진술이다. 미술인이 아니라면 미술전문지 중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는 『월간미술』도 직접 대면할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현대 미술이 좀 그렇다. 우리의 삶과 점점 소원해졌다. 비슷한 연유에서 『월간미술』에 실리거나 실릴 만한 이야기들도 다수의 공감 밖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지 기록해온 이건수 편집장의 글만은 미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어느 정도 붙들어준다.
그가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미술』에 실은 사설을 엮은 『editorial』은 오랫동안 미술 신을 안팎에서 바라본 그의 독백이다. 유명 작가의 회고전, 국내외 비엔날레, 신정아 사건, 미디어아트, 미술관, 미술의 자족성, 공공미술 등 여러 영역과 사건을 미술애호가, 생활인, 관객으로서 바라보고 때로 문화사적으로, 때론 시적으로 풀어낸다. 미술잡지의 편집장이라는 특수한 분야의 중핵에서, 그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시점을 취해보는 방식으로 여러 가지 글쓰기를 시도해보는 것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건수 편집장의 밤낮을 채우고 그를 괴롭혔던 생각들을 읽어가며 우리는 두 가지를 얻는다. 세기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미술계가 짤막한 호황을 누리던 시기부터, 불황과 더불어 나날이 파편화되는 최근의 경향을 엿볼 수 있고, “생각의 범위를 얼마간 넓혀줄 수 있는, 우리 속 흐르는 피의 속도를 리드미컬하게 조절해줄 수 있는” 미술의 기능에 다시 기대를 걸어볼 여지를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