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ne, 2021

삶이라는 달리기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적절한 균형』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인도 출신의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을 읽으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 떠올랐다. 시험용 단골 텍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난쏘공을 처음 읽은 고등학생에게 ‘난장이’로 대표되는 세계는 어려웠다. 대학 입학 후 한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난쏘공을 언급하며 물었다. “너희는 정말 간절하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해도 가지지 못했던 경험이 있니?” 안 가지면 그만이지, 라며 심드렁하게 넘길 수도 있었을 그 질문이 나에게는 머릿속 한가닥의 퓨즈가 나가는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간절한 바람을 이루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일, 하지만 생존이 걸려있어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소설 속 삶을 보면서 가슴이 저렸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세계가 허구인 것은 아니니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숨죽여 쓰이고 있는 인간사의 한 면일 것이다.
『적절한 균형』 속에 펼쳐지는 삶 역시 처절하고 비극적이다. 등장인물들의 삶에 던져지는 커다란 돌덩이가 내 마음에 함께 쌓여서, 그 묵직한 아픔에 가슴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감히 분노할 수조차 없었다. 장애물 달리기에서 허들을 넘듯, 등장인물들은 삶의 질곡을 넘어가며 경주를 계속했다. 나는 그들의 느릿한 경주를 숨죽이고 따라갈 뿐이었다. 현실에서도 개인의 삶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법이다. 이전까지는 인도를 요가와 명상의 나라, 문명과 불교의 발생지, 갖가지 갈등을 초월하는 신성한 내면의 태도를 지향하는 나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뒤 인도는 우리나라 근대사와 맞물려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가 되었다. 마치 난쏘공처럼. 그리고 이 세계는 내가 지금껏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그 어떤 세계보다도 크고 강렬했다.
이 책을 읽어가는 여정 역시 장거리 달리기 같았다. ‘왜 힘없는 개인은 삶의 터전을 잃어야 하는가’라는 분노에서 시작해‘과연 사회는 개인을 둘러싸는가, 혹은 관통하는가’라는 의문을 지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결승선을 통과했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 아닌 이유로 핍박받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봉사가 된 옴프라카시와 이시바, 남성중심의 관념에 짓눌리면서도 홀로 서고자 하는 디나, 아들의 삶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고 싶어하는 아버지 때문에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원치 않는 교육을 받는 마넥 콜라를 중심으로, 소설은 인도 각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 각자의 기억과 추억이 깃든 이들의 삶은 디나 부인이 만드는 이불의 작은 천 조각들처럼 소설 속에서 서로 연결된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던 삶들은 서로의 비극을 확인하고 연대하면서 비로소 융합되어간다.
중국의 작가 위화는 『인생』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회의 질곡에 걸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삶을 이보다 더 담담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적절한 균형』의 마지막에는 불구가 되는 옴프라카시와 이시바의 비극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불구
가 되고 난 후에도 서로 의지하고, 디나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담소를 나누며 느릿느릿 주어진 시간을 걸어간다. 삶 자체는“괴물”이기에 사람들은 “치욕과 인내를 영원한 동반자”로 삼으며 살아가지만, 시간을 견디다 보면 어느새 “희망과 절망의 균형을 찾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삶 자체를 살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삶의 동반자와 함께일 때 지속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