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 2021

불타는 책과 찢어진 그림 조각

글.최재천

SF 전문출판사 아작 편집장. “내겐 새 책이 있고, 책이 있는 한, 난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_ 조 월튼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숱한 멍때리기 중 ‘불멍’이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불을 지르는 것이 직업이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것이다. 게다가 그 방화의 대상이 책이라면?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의 배경은 책을 읽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모두 금지된 미래사회다. 말 그대로 모든 책이 불법인 이곳에서는 책을 소유했다가 적발되면 그 집까지 함께 불태워버린다. 정의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放火手) 몬태그는 이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무엇인지도 모를 책을 집과 함께 불태워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의문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책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까?”
_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중

과연 책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 다 없애버려야 하는지 자문하게 된 주인공은 몰래 책을 한 권씩 훔쳐서 빼돌리기 시작하다, 결국 책을 태워 없애는 사회를 전복하기로 결심한다. ‘화성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불리며, SF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전미도서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레이 브래드버리. 그가 1953년에 발표한『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디스토피아를 그렸지만, 다소 역설적으로, 출간 70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힌 SF 도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정의의 이름으로’ 태워 없앨 것이 어디 책뿐이겠는가.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기원전 진시황 때도 있었고, 가까운 역사인 문화대혁명에도 있었다. ‘단편의 제왕’으로 유명한 브래드버리는 책을 태우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것이 금지된 사회를 그린 단편을 쓰기도 했다. 1952년, 『판타스틱 매거진』에 발표한 「미소」가 그것이다.
배경은 2061년, 이 사회 역시 엉망진창이다. 도로는 폭격을 맞아 울퉁불퉁해졌고, 도시는 쓰레기 더미가 되었으며 농경지는 방사능으로 번들거린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추위에 떨며 굶주린 채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이제 사람들을 지탱하는건 번창하였으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망쳐버린 과거 사람들에 대한 미움뿐이다. 그리고 그 미움을 표출하는 방식은 이전 세대가 남겨 놓은 모든 문명의 자취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광장에 모여 책들을 찢어발기고 불태우며, ‘과학 축제’ 때는 마지막 남은 자동차를 끌고 와서 대형 쇠망치로 부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선조들이 남긴 그림 한 점이 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그림에 말 그대로 “아주 정확하고 깔끔하게 침을 뱉기 위해” 새벽 5시부터 광장에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리고 경찰이 그림을 성난 군중에게 넘기는 순간, 사람들은 그림에 침을 뱉다 못해 굶주린 새 떼처럼 그림을 쪼아대고 캔버스 조각을 이로 물어뜯고 액자를 부순다. 이 그림은 다름 아닌,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작가는 ‘불태우는 일이 즐거워서’ 이렇듯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야기를 쓰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 어떤 상황에서든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고 지켜내는 누군가를 희망하면서 이런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까. 방화수 몬태그가 자신의 손으로 불지르는 집에서 책 한 권을 훔치듯, 「미소」의 주인공, 소년 톰 역시 그림에 침을 뱉으러 나갔다가 찢어진 〈모나리자〉 한 조각을 손에 넣어 집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달빛 아래 온 세상이 잠든 밤, 챙겨온 그림 조각을 몰래 펴서 감상한다. 소년의 손안에는 미소가 담겨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가 나타날 거야.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되돌려줄 거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문명 말이지.”
_레이 브래드버리, 「미소」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