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14

냉소적인 사람이 겨울을 준비하는 법

Editor. 유대란

12월이 와버렸다. 빳빳하고 반듯한 새 다이어리에 새해 계획을 적을까 하다가도 매년 지키지 못한 반복되는 다짐과 문구들이 떠오르며 작아진 자신과 마주하는 징글징글한 달. 선배의 의리 없다는 한마디가 걸려 송년회 자리에 나가면 술이 센 탓에 끝까지 살아남아 너저분한 주사 테러를 당한다. 그러면서 결국 올해도 또 이런 거구나 싶다. 숙취와 일조량의 결핍보다 어김없이 들리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나 활기찬 연말 인사는 더욱 달갑지 않다. 그래도 무기력할 것까지는 없다. 달력 한 장 넘기는 것으로 희망을 주입하는 상황을 비웃어 넘기면 된다. 그리고 묵묵히 일상의 페이스를 유지하면 그만이다. 귀 따갑게 들려올 희망과 작위의 연말 인사를 거부하는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책들을 모아봤다.

『상식을 뒤집는 Wit & Wisdom』 오스카 와일드
북인

“누구든지 연기를 할 수 있다. 영국인의 대부분은 연기 외에는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결혼의 유일한 매력은 쌍방의 허위 생활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해 준다는 사실에 있다.”
“사회는 범죄자는 용서하지만 꿈꾸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본문 중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동화로 손꼽히는 ‘행복한 왕자’를 기억하는지. 동화에서 왕자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눈마저 내어주는 숭고한 희생의 아이콘이다. 이토록 훈훈한 동화를 읽고 자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게 그 오스카 와일드야?” 이 책에서 와일드는 그럴싸해 보이는 것, 중요하게 여겨지는 삶의 모든 것에 냉소적인 독설을 퍼붓는다. 그는 ‘나의 결혼 생활은 행복할 것이다’ ‘사회는 정의롭고 공정한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등의 우리의 믿음과 상식을 비웃는다. 그는 상식이란 것이 대부분의 경우 부인과 허상에 기초하거나 때로는 학습에 의해 주입된 불완전하고 편협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살았던 1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상식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은 별로다. 그렇다고 그가 우리에게 혐오와 모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자신도 별로임을 조금 먼저 인식한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별로임을 지적할 뿐이다. 뼈 있는 말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던져주는 친구의 사설쯤으로 여기고 읽기를 권유한다. 몇 장 넘기지 않아 낄낄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북로드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주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본문 중
유독 혼자 있고 싶은 날 『인간실격』을 뒤적이게 된다. 이 소설은 세상의 위선과 잔혹성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젊은이의 이야기이며 4번의 자살 미수 후 5번째에야 성공한 작가의 자전성이 짙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보며 자신을 세상의 위선과 잔혹성의 피해자로 여기거나 다자이 오사무를 다난한 시대에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순교자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든 다자이 오사무든 그들이 보여주는 자기 파괴 욕망의 일차적인 근원은 극단적 나르시시즘에 있다. 다만 그것이 좀 ‘간지’ 나 보이는 것은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낭만적으로 포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귀찮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 그 상태를 약간 낭만화해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읽어보기를. ‘사회가 날 힘들게 해’ ‘나는 이해받지 못한다’ 따위의 우스운 발상은 이제 그만 졸업하고.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민음사

“고양이: 타인의 꿈 이야기와 고양이 이야기만큼 시시껄렁한 것도 없다. 양쪽 다 두서 없고 당사자가 생각하는 만큼 재미있지도 않다.” -본문 중
어릴 적,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본 사람이면 다 안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가령 ‘사랑’이라는 명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가만, 그게 그렇게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만 들던가. 좋을 땐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좋지만 수틀리면 증오에 사로잡혀 잠 못 들게 하는 그런 게 아니었나.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낱말의 사전적 정의가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배반하는 경우들을 다룬다. 마흔일곱 개의 낱말을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으로 재정의한사적 사전이다. 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삶과거리가 먼 듯한 사전적 정의와 환상에 거부감을 지닌 이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유미리는 작가의 말에서 사전적 정의를 ‘공동 환상이 뒷받침하고 있는 언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만약 작가가 이 책에서 ‘새해’라는 단어를 정의했다면 ‘새 달력을 구매하면 덤으로 딸려오는 희망에 대한 집단 환상’ 정도가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