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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8
기다려라, 드래곤! 스테이크로 만들어주마!
Editor. 한진우(메디치미디어 편집자)
새해 들어 금연을 결심했지만 16시간 만에 “마약 중독자를 얕보지 마!”라고 외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연의 대가로 구입했던 플스VR을 아내가 팔아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모험을 떠난 적이 있다. 4박 5일 동안 산과 들을 누비며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전투가 예정된 모험이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비열한 적군이 아군의 취사장에 집중 포격을 해댄 것이다. 한창 밥을 짓던 취사 시설은 완파, 취사병마저 전멸했다. 비상식량인 잡채밥을 계곡물에 불려서 먹었지만 철사 같은 당면이 제대로 소화될 리 없었다. 곧 아군은 성인용 기저귀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고 지리멸렬하게 패퇴했다. 나 역시 “전사자에게는 따뜻한 음식 및 이동식 화장실 제공”이라는 주최 측의 유혹에 못 이겨 야음을 틈타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다들 눈치챘듯 이 참혹한 일화는 칙칙한 군대 이야기다. 그런데도 당신이 이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모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밥’이라는 것이다. 군인들이 전쟁을 일삼는 이유가 ‘맨날 맛없는 전투식량을 먹다보니 하나같이 신경질적이 되기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도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일하는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산뜻하게 픽션과 ‘밥’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던전에서 먹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싶거든 「마리오와 버섯군」이라는 단편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쿠파를 짓밟기 위한, 아니 피치 공주를 구하기 위한 모험 중에 벽돌에서 튀어나온 버섯군을 마리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으로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감동적인 식도락 이야기다. 한편 「파이널 판타지7」에서 클라우드가 귀여운 초코보를 바삭하게 튀겨 치킨처럼 먹는다든지, 90년대 최고의 청순가련 히로인으로서 뭇 남성들을 ‘도키메키(두근두근)’하게 만들었던 에어리스가 늑대형 동료를 보신탕으로 끓이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요점은 모험은 먹는 것과 떼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때 판타지 세계의 음식 이야기를 적절히 풀어낸 수작이 등장했으니 바로 『던전밥』이라는 만화다. 이야기는 주인공 일행이 던전에서 드래곤을 만나 영혼까지 털린 끝에 간신히 도망치고 치료비로 전 재산을 탕진하면서 시작된다. 거지가 된 일행은 심기일전하고 다시 던전에 도전하지만 식량을 못 사 굶어 죽을 판이다. 어쩔 수 없이 몬스터라도 먹으려 들지만, 요리법을 알 턱이 없다. 이때 우연히 몬스터 요리 전문가인 드워프 ‘센시’를 만나 함께 모험하게 되고 점점 금단의 몬스터 요리에 빠져든다. 몬스터 요리라니 욕지기가 나올 법도 하지만, 가재나 푸딩 대신 전갈과 슬라임을 요리한다는 게 현실과 다를 뿐, 본격 RPG 요리 어드벤처라는 장르에 걸맞게 친절한 레시피와 식감 묘사가 여느 ‘먹방’ 이상이다.
예컨대 인간을 통째로 삼키는 슬라임, 1m짜리 전갈, 걸어 다니는 근육질 버섯을 잡았다면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센시가 옆에 있다면 당신은 멋진 전골 요리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슬라임을 감귤 과즙에 씻어 냄새를 빼고 볕에 말려서 ‘건면’을 만든다. 전갈은 독이 있는 꼬리와 다리는 버리고 몸통을 6 등분 해 칼집을 낸다. 내장은 버리지 않고 젓갈을 만든다. 근육질 버섯은 냄새 나는 엉덩이를 버리고 머리, 몸통, 발을 적당히 자른다. 전갈 몸통으로 육수를 내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후 버섯을 넣으면 ‘전갈&걷는 버섯 전골’ 완성이다! 참고로 슬라임 건면은 굵은 당면 대용이니 기호에 맞게 익혀 먹자.
한편 여성 엘프 마법사 마르실은 평소에는 질색을 하다가도 요리를 맛보고는 “우마이(맛있어)!”를 연발하는데 결국 이 처자도 물가에서 싸우던 도중 ‘마력이 바닥났다 → 정령은 마력을 품고 있다 → 그럼 운디네를 요리해 먹으면 되겠네?’라는 정신 나간 작전을 세운다. 그리고 기어이 ‘운디네 수프’를 만들어 먹는다.
서점에는 간단한 요리라면서 20개가 넘는 식재료를 준비하라는 반 서민적인 요리책부터 언감생심 식비보다 항공료가 더 나오는 일본·유럽 맛집 만화가 우리를 기만한다. 이때 『던전밥』을 집어 드는 용기를 발휘해보라. 센시와 함께 떠나는 멋진 식도락 모험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