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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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9

과연, 술이란 무엇인가

Editor. 김지영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샌들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고 있노라면 자유롭기 짝이 없다.

『아무튼, 술』
김혼비 지음
제철소

언젠가 꼭 술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물네 살 때까지만 해도 술자리를 즐기긴 했지만 술맛을 전혀 몰랐던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술생’에 눈 떴다. 학창시절 나는 남몰래 ‘골뱅이’ 문학도들을 동경했고 한자리에서 술잔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수저 하나 올리는 것 같아 좋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달고 쓴 인생을 술잔에 따르고 한입에 털어 넣고 또 따르는 애달프지만 위로가 되는 퇴근 후 술자리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이 더 술맛 나는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래서 꼭 음식, 안주, 술로 술술 넘어가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기회만 생기면 원고에 술을 끄집어 넣고 만족하기도 했더랬다.
자기만족을 일삼던 중 사무실에 도착한 신간 『아무튼, 술』을 발견하고 순간 ‘빼앗겼다’는 무례한(?)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세상에는 술의, 술에 의한, 술을 위한 ‘프로알코올러’들이 판을 친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만의 술 철학을 가지고 있고, 돗자리만 잘 깔아주면 그곳이 어디든 밤새워 술 얘기만 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어쨌든 나는 소주나 맥주 같은 서민적인 술 외에는 잘 몰라 지레 겁먹고 글 쓰기를 주저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빼앗긴 것도 아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사무실 소파에 앉아 무작정 몇 장을 다 읽었다. 작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몇 장 읽었는데, 작가가 주류와 비주류 얘기를 하며 자신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썼다는 문장을 발견하곤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재가 좋아서, ‘아무튼’ 시리즈가 좋아서, 작가가 좋아서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파트씩 아껴 읽었다. 한 파트를 읽고 난 후에는 그녀와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안주 삼아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자리가 성사되면 꼭 이 말을 뱉으며 포문을 열었다.
“나 이 책 읽으면서 왜 자꾸만 내가 보이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술생 사는 사람들은 술이 일으키는 화학작용 때문에 비슷한 생각, 경험,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늘을 날 수 있다며 친구 등에 업혀 슈퍼맨 놀이하며 인생 첫 술주정도 부려봤고, 친구와의 여행에서 ‘삼시술끼’를 몸소 실천하며 다음 날 복국으로 해장하며 첫 해장술도 마셔봤다. 소주 첫 잔을 따를 때만 들을 수 있는 ‘소주 오르골’의 존재를 알고 있고, 혼술을 즐기고 있는데 궁상떤다며 혀를 차는 사람과 마주친 경험이 있다. 공감 이상이다. 자꾸만 내 모습이 아른거려 주로 출근길 버스에서 책을 읽으며 실실 웃었다.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옆에 앉은 사람이 자리를 바꿔 앉았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았는데, 왕왕 만원이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공감을 얻으려 발버둥 쳤다. 옆자리 동료가 건넨 과하지 않은 맞장구와 술 좋아하지 않은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냐는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대답을 내놨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만 읽어야 해요.” 두 가지 의미로 뱉은 말이다. 하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격하게 공감하고 재미있게 읽을 책이다. 둘, 술 좋아하는 사람만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나 공감 따위 찾을 수 없을 법해서 책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책이나 술이나 마찬가지다. 과한 권유와 칭찬은 금물이다. 에세이가 특히 그렇다.
팟캐스트 <아무튼, 팟캐스트>를 한동안 듣지 않다가 어느 날 트위터에 술 마시며 잘 녹음하고 왔다는 ‘오라질년’의 트윗을 확인한 후 업데이트 소식을 접하자마자 들었다. 이것도 어찌나 아깝던지 몇 번에 걸쳐 들었다. 작가의 매력에 빠져 결국 올리지 못했지만 그녀의 책이 또 나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응원의 댓글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아무튼, 술』은 술생 사는 사람들이 보면 아침부터 술 생각에 사로잡힐 책이다. 다이어트, 건강, 피로 등을 핑계로 술을 멀리한 이들에게는 쥐약이고, 어제 마신 술의 기운이 남아 숙취로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오늘의 술을 독려하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다음에 또다시 술과 관련된 에세이가 나온다면 이것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대체로 술 얘기하는 책치고 ‘알쓰’들에게 이 와인은 무슨 맛이 나서 좋고 저 맥주는 어떤 홉이 들어가서 맛있고 등을 떠드는 바람에 상대적 박탈감 안 주는 책이 없다. 이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척 서민적이지만 약간은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그녀가 매력적이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