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las of Life : 삶의 아틀라스

우리 영화의 얼굴

에디터 지은경
사진 © 양해남 컬렉션

골목 곳곳에 걸려있던 영화 포스터들을 기억한다. 어린 나이라 볼 수 없었던, 그래서 더 또렷하게 기억나는 어른들의 영화. 이를테면 〈영자의 전성시대〉 〈무릎과 무릎 사이〉 〈뽕〉 같은, 어린 애들은 차마 상상할 수도 없을 격정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던 영화들 말이다. 필름 원본만큼이나 영화 포스터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 열성적으로 모아온 수집품 목록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행운을 기다릴 뿐이다.
최근 영상이 대중의 가장 큰 오락거리로 부상했지만, 영화는 이전부터 영향력 있는 매체로 자리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고, 수많은 문학작품이 영화로 다시 태어나면서 뭇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 초창기 한국 영화는 시시하게만 보일 수 있다. 특히나 외국 영화가 대거 유입되던 때에는 “왜 우리는 미국이나 홍콩처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느냐”는 모진 말들을 뱉던 관객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한국 영화가 이제는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며 그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치고 있는걸 보면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1989년부터 영화 관련 자료수집을 시작한 양해남은 국내 영화 자료 수집가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한국 영화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한국영상자료원조차 양해남의 협조가 없다면 책자 하나 만들기 어려울 만큼, 그의 컬렉션은 방대할 뿐 아니라 가치 측면에서도 뛰어나다. 그가 소장한 2,400여 점의 영화 포스터 가운데 절반 이상이 유일본이거나 희귀본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옛날 극장에 걸려 있는 포스터,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의 자료 화면으로 쓰이는 포스터 상당수가 그의 소장품을 복사한 것이기도 하다.
그를 이렇게 집요한 수집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시골의 작은 극장에서 영화에 매혹되었던 소년 시절의 기억 덕분이다. 세상만사를 극장에서 배웠다는 그는 아침 먹고 극장에 들어가 하루 종일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어 어둑해질 무렵 극장 청소부의 등에 업혀 나오던 별난 꼬마였다. 그렇게 영화에 흠뻑 빠져 살던 소년은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너무나 사랑하는 대상이 겨우 얼굴 한번 보여주고는 영영 사라져버리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것. 결국 그는 20대 중반이던 1989년부터 영화 필름과 영사기, 포스터 등을 닥치는 대로 모으는 수집의 길에 들어섰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포스터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보통의 수집가들과 다른 점은 자신의 소유욕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해소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장품 리스트 대부분을 공개했고, 거의 모든 포스터를 디지털화하여 다음Daum 포털 사이트에 제공해 비상업적 용도에 한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오랜 수집의 길을 걸어오며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숱한 어려움을 겪은 그는 자료의 가치는 혼자 손에 쥐고 있을 때가 아닌,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유롭게 이용할 때 돋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의 남다른 행보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 영화계에, 그리고 옛 영화를 그리워하고 궁금해하는 대중에게 풍요로운 아카이브가 되어준다. 책은 1950년부터 1989년에 제작된 한국 영화 포스터 248점을 소개한다. 영화의 단면을 담은 포스터에는 한국 사회의 욕망과 부조리,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다. 우리 사회의 미학과 시선이 변화하는 풍경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안내하는 동시에, 현재의 위치에 올라서기까지 한국 영화가 걸어온 발자취를 정직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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