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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카츠의 꽃

에디터. 전지윤 자료제공. Thaddaeus Ropac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확립시킨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는 초반에 유럽의 비평가들에게 혹평받기도하며,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헤롤드 로젠버그 등 당대 대표적 비평가들에 의한 논쟁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잭슨 폴록, 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과 같은 아티스트들은 거대한 캔버스에 직관적이고 역동적인 추상 회화를 창조하며 다소 파격적이기까지 한 예술 실험에 몰두했다.
이러한 시기에 구상회화(具象繪畵)를 내세우며 등장한 알렉스 카츠Alex Katz는 마치 이단아와 같았다. 추상회화에 대한 다소 맹목적 선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낡고 고루하다며 예술가로서 철학은 빈약하고, 사회와 정치에 대한 메시지가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구상과 추상 사이의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이 별난 아티스트는 묵묵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95세가 된 지금까지도 매일 거대한 캔버스에 인물, 풍경, 꽃에 이르는 대상을 재현하는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고, 그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는 여전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알렉스 카츠가 이루어낸 미술사의 최대 성과는 추상회화의 시대적 의제와 형상회화의 개인적 관심을 하나의 화면에 화해시킨 역량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일상의 회복이다. 추상적이고, 정신적이며, 형이상학적 도피를 추구했던 현대미술의 분위기에서 일상의 주제로 의제를 선점한 것은 알렉스 카츠의 위대한 공헌이다. 세 번째, 회화의 방법론이다. 형상회화에서 편편한 화면, 예리한 엣지, 획기적 화면구성, 감각 영역의 확장 등은 알렉스 카츠가 다른 화가보다 선취(先取)해 낸 업적이다."
대개 알렉스 카츠의 대표작으로 인물화, 특히 초상화를 꼽는다. 그의 작품들은 뮤즈이자 아내인 에이다와 가까운 지인 등의 찰나의 순간을 거대한 캔버스에 옥외광고판이나 영화의 한장면처럼 포착하는데, 절제된 묘사와 얇고 평평한 붓질로 이룬 큰 색면 배경이 특징이다. 그의 초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인물의 스타일과 나아가 표정과 몸짓에 집중해 작품 속 상황과 시공간까지 실감하도록 한다. 그의 군상 작품에는 여러 인물이 배치되어 마치 한날한시에 한데 모여 연출된 것처럼 보이지만, 인물 개개인의 개성과 감정,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재현한다. 카츠는 평면에 재현된 인물들을 실재하는 조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인 ‘컷-아웃(Cut-out)’으로 연작하는데, 사람 형상으로 잘라낸 합판이나 금속판에 인물을 그려 평면조각으로 변화시키는 이 방법으로 2차원의 시공간에 머무르던 인물들을 작품을 보는 이들과 같은 3차원의 시공간으로 옮긴다.
카츠가 압도적인 크기의 캔버스에 그리는 풍경화에는 인물화에 비해 디테일 묘사가 더욱 더 절제되어 있다. 그가 그려내는 풍경은 원근감이 배제된 색면으로만 구성된 것같이 보이지만, 색에 중점을 두거나 추상화의 기법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츠는 그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보낸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그 시공간을 감싸고 있던 공기와 빛을 재현해 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인물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실재하는 곳, 삶이 벌어지는 장소와 시간을 그림 속에 재현함으로써 캔버스를 삶의 일부로 연결하는 것이다.
아티스트가 인물과 풍경만큼이나 캔버스에 옮기는 데 많은 연구와 다양한 시도를 한 형상은 바로 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잘 담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꽃 그림이기에, 알렉스 카츠는 꽃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를 묘사한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평면적이고 단순한 묘사로 형상의 본질을 충실히 탐구한다. 그가 사용하는 것은 알라 프리마alla prima 혹은 웻온웻wet-on-wet 기법으로,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물감을 칠해 칠이 중첩되어 불필요한 두께감과 무게감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직접회화direct painting의 생생하고 자유로운 느낌의 표현 역시 가능하게 해, 카츠의 꽃들은 유화 물감으로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운 무게감을 나타내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을 받아 빛나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카츠가 화병에 담긴 꽃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로 메인(Maine) 주에 위치한 그의 여름 별장에서였다. 작가는 ‘비가 오고 있어서 꽃을 잘라 화병에 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년 뒤에도 어차피 동일한 과정이긴 했지만 그때는 화병보다 꽃에 더 관심이 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꽃 그림은 60년대에 했던 군상화 작업과 비슷했다고 한다. 꽃이라는 양감(量感)있는 형상이 겹쳐져 있는 모습은 인물들이 모여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는데, 그가 그렸던 칵테일 파티 장면에서 표현이 잘 되지 않던 운동감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알렉스 카츠는 무게와 부피감을 가진 꽃이 공간에 위치하는 모습, 공기의 흐름이 만드는 움직임, 꽃들이 한 공간에서 흔들리고 겹쳐며 만들어 내는 역동적 관계성을 인물 군상을 그릴 때 인물들 사이에 일어나는 역동성과 연관 짓는다. 아마도 꽃들은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연습하는 데에 비해 수많은 상황을 연출하기에 수월했을 것이다. 큰 캔버스에 옮기기 전 완벽에 가까운 습작이 나올 때까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카츠에게 있어 꽃이란 대상은 꽤나 좋은 주제가 되어 주었음이 분명하다. 움직임이 일어나는 동안 포착한 찰나의 인상은 꽃 그림으로 전이되었다고 할 수 있다.
『Alex Katz: Flowers』는 타데우스 로팍 서울Thaddaeus Ropac Seoul에서 열린 알렉스 카츠의 개인전 〈Flowers〉에 전시되었던 작품들과 미술사학자 이진명의 에세이를 담은 도록이다. 이 전시는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서울 개관 후 두 번째 전시였다. 2021년 12월 9일이 오프닝이었으나 일주일 가량 지난 뒤에도 문밖을 나서기가 굉장히 어려운 분위기였다. 2020년 1월부터 빠르게 퍼져 나간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며 팬데믹이란 불명예스러운 훈장까지 획득했기 때문이다. 초기에 모두를 떨게 하던 두려움과 경계심은 무뎌져 가고 있었지만, 오히려 무기력감에 지치는 기분이 지속되고 있었다. ‘알렉스 카츠’라는 이름만으로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는 게 당연한데 지척에 있는 알렉스 카츠의 전시회를 찾아가는 길에 이토록 결심이 필요했던가.
‘세상이 약간 격려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하고 미소 지었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더 빨리 가볍게 찾아오지 않았던 스스로를 꾸짖었다. 2021년 작 〈Straw Hat 2〉의 여인처럼 가볍고 화사하게 꽃들을 맞이하고 향기를 들숨 가득 들이마시는 여유를 누렸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알렉스 카츠가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의 초기에 꽃 시리즈를 다시 그리기 시작한 이유이자 이 전시를 찾는 이들에게 선물하고자 했던 경험이다. 그리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그의 꽃 그림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밑그림이 보일 것처럼 얇고 평평한 붓질과 물감이 마르기 전 색을 빠르게 칠하는 기법은 여전하지만, 최근에 그린 꽃들은 이전에 비하면 더 표현적이다. 그림자와 묘사가 더해지며 꽃의 형상, 그 부피감이 좀 더 강조되었다. 야외의 자연광 아래 꽃들이 보이는 대로 더 밝게 표현되어 바람이 불 때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꽃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져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내야 했던 우리는 카츠의 작품에서 95세 노장의 정다운 선물을 받는다. 실제 꽃을 보는 듯한 찬란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매일 정성스레 꽃을 그렸던 아티스트의 희망은 전시장을 찾았던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 여운과 감동은 도록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April23_Inside-Chaeg_01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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