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몰입의 순간을 헤엄치다

에디터. 전지윤 자료제공. 에이치비프레스

『수영하는 사람들』의 표지 속 주인공을 보자마자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로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분홍색 꽃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남색 수영복을 입고, 아이보리색 수모와 얼굴에 비해 유난히 커 보이는 까만 물안경을 쓴 채 서 있다. 꼭 다문 입술이 어딘가 어색해 보일 무렵, 수영장 바닥이 하얀 눈으로 살포시 덮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뒤로 펼쳐진 배경에 또 한 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온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듯 수증기가 부옇게 공기를 채우고,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눈 내린 날 야외에서 수영복 차림이라니, 설령 전문 모델이라 할지라도 멋지게 서 있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추운 겨울 야외수영장, 수영복 차림에 맨발로 서 있는 누군가처럼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곳, ‘이스트런던의 동네 수영장’에는 궂은 날씨에도 어김없이 수영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시골 출신이다. 잉글랜드 남서부에 있는 데번 주에서도 아주 외진 곳에서 자랐다. 그런 사람에게 런던의 삶은 대단히 치열할 수 있다.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면 다시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로라, 26세, 행위예술가)”
책의 원제는 ‘East London Swimmers (이스트런던의 수영하는 사람들)’이다. 사진 전문 서적을 출판하는 혹스턴 미니 프레스Hoxton Mini Press에서 ‘이스트런던 포토 시리즈East London Photo Series’로 기획한 두 번째 책이다. 오래전부터 이스트런던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정착해 살았다. 웨스트런던에 비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빈곤했던 탓에 우범지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의 사람들이 섞여 살아왔기에 런던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맛과 향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집세와 물가를 찾아 예술가와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이스트런던에는 더욱 다채로운 색이 더해졌다.
어느새 이스트런던의 해크니Hackney, 쇼어디치Shoredit-ch, 브릭스턴Brixton, 혹스턴Hoxton 등은 런던 힙스터들의 성지로 변모했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젠트리피케이션이 들이닥쳤고, 또 다른 사회적 문제들을 마주하게 됐지만, 매들린 월러Madeleine Waller는 『수영하는 사람들』에 사회적, 경제적 논란을 끌고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는 카메라에 찍힌 인물들을 그저 매일의 삶을 사는 주민들로 바라본다. 이들이 수영하기 위해 찾는 해크니의 야외 수영장 ‘런던필즈 리도’는 폐쇄와 철거의 위기 속에서 지켜낸 역사적 공간인 동시에 누구라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개방된 곳이다.
“호주와 싱가포르, 홍콩, 그리고 최근에 갔던 자메이카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야외수영장에서 수영을 해봤다. 하지만 리도는 해크니 한복판에 우리만의 전용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곳을 ‘혹스턴 해변’이라고 부른다. 런던에서 반벌거숭이의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볼 수 있는 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스튜어트, 37세, 트래블 어드바이저)”
‘리도’는 해변, 해수욕장, 모래로 된 섬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국에서는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진 공용 옥외 수영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 전국에 약 100여 개의 리도가 있다. 50m 길이의 여덟 개 레인이 있는 해크니의 런던필즈 리도는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수영할 수 있도록 일 년 내내 수온을 섭씨 25도로 유지하고 있어 지역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수영장에서 300m도 채 떨어지지 않는 곳에 19년을 살며 그 굴곡진 역사를 지켜본 저널리스트 로버트 크램튼은 이곳을 가리켜 “성공과 긍지가 첨벙거리며 물보라치는 생명력”을 가진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매들린 월러가 이곳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빛나는 에너지를 사진에 담아 펴낸 『수영하는 사람들』은 “이 지역의 부활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와 같다.
“오랜 야간 근무를 마친 후에 수영하러 가는 걸 좋아한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피곤하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느낌… 생각을 비우고 긴장을 풀기에는 제격이다. 내 몸은 내가 원하는 한 수영을 계속할 테고, 생각을 떠 오르는 대로 내버려두면 문제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수영을 하고 나면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벤, 34세, TV 프로듀서)”
박자에 맞춰 팔을 젓고, 쉬지 않고 발차기를 해야만 물속에서 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먼 거리를 수영해서 이동하려면 팔을 젓는 리듬에 따라 고개를 살짝 돌려 입으로 호흡하는 것에도 집중해야 한다. 머리, 팔, 다리가 각기 다르게 움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멈추고 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수영하는 시간 동안 물 밖의 소리는 희미해지고 호흡을 마시고 내뱉는 자신의 숨소리만 증폭되어 들린다. 레인을 돌면 돌수록 숨이 조금씩 가쁘고 목과 가슴이 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코스로프를 잡고 멈춰 서버리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며 남은 힘을 쥐 어짜내다 보면 간절히 뻗은 손끝은 어느새 벽에 닿는다. 얼른 몸을 세워 고개를 물 밖에 내밀고 숨을 몰아쉬면 안도감과 함께 어떤 만족감이 든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끄러운 생각들과 걱정은 어느새 잔잔해진다. 수영은 단지 운동이라기보다, 정신에는 고독한 평온함을 주입하고, 몸의 체력적 한계선을 조금씩 밀어내도록 하는 의식이 아닐까.
“내가 수영을 하는 건 물에는 어떤 정직함이 있기 때문이다. 수영은 삶에 대한 내 인식을 바꾸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알 수 없는 물의 어떤 특성이 내가 사라진 후에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생각하게 만든 것 같다. (밴, 25세, 수영강사)”
매들린 월러의 사진에는 인물, 정체성, 장소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특정 장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둔다. 『수영하는 사람들』 속 인물들은 모두 리도에 수영하러 오는 사람들로, 월러의 카메라 앞에서 수영복을 입고 한 컷, 평상복을 입고 한 컷, 이렇게 두 컷의 사진을 촬영한다. 그리고 월러는 각 인물에게 수영이 갖는 의미와 수영하는 이유를 묻고, 그 답변을 기록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일상복을 입었을 때와 수영복을 입었을 때의 모습이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마치 다른 두 명의 사람인 양 보일 것이라고는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지에서 눈길을 끌었던 꽃무늬 수영복 차림의 로라와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 로라는 수영장 레인의 거리만큼 큰 차이가 있다. 수영하는 그녀는 언 발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수줍어할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수영장에서 나와 도시로 돌아갈 때의 로라는 어두운색의 두꺼운 점퍼를 입고 묶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 이마와 귀, 목을 가렸는데, 소위 말하는 ‘세 보이는’ 외모다. 겨울바람과 도시의 찬 기운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무엇이 이토록 한 사람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걸까?
수영에 집중하면 차단되며 오롯이 내 숨소리와 몸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게 되므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가 무의미해진다. 물속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거나 비밀스레 간직하려던 정체성을 자유롭게 풀어주는지도 모른다. 수영을 할 때는 타인을 인식하는 방식에 무감각해지기에 그 순간을 포착해 낸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숨겨졌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로라 이외에도 월러의 인물 초상에 등장한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무게와 상처, 꿈과 목표를 갖고 있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바깥세상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틈틈이 따뜻한 물이 기다리고 있는 리도로 돌아와 일상을 훌훌 벗고 헤엄친다. 그 과정을 통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온전히 내 숨소리와 몸의 움직임에만 집중한 시간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한동안 크고 빛나는 에너지가 되어주리라.
October21_Inside-Chaeg_02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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