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돈이 우리를 구원할까?

에디터 : 전지윤 김수미 윤형중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속 이 문장은 비유라기보다 사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아침마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고 일터로 향하게 만드는 것도, 스트레스를 꾹 누르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먹고 싶은 음식 대신 컵라면을 집어 들며 몇천원 앞에 작아지는 것도 모두 우리 안에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어떤 감각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돈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읊조려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갖게 되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게 얻어진 자유가 정말 나를 자유롭게 할까? 돈으로부터 파생되어 우리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질문들을 들여다보자.
1-돈, 선망과 탐욕의 대상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은 화폐를 차갑고 단순하고 객관적인 존재, 인간미 없는 교환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 화폐는 단순히 가치를 환산하고 편리하게 보관하기 위해 고안된 교환 수단이 아니다. 화폐는 피와 욕망으로 묶인 사회 구조의 핵심 요소다. 그러니 사람들이 돈에 환장하는 것은
당연하다.”_제이컵 골드스타인,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 중

월스트리트 저널리스트인 제이컵 골드스타인Jacob Goldstein은 현대인의 삶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편해지고 부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돈의 위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대로 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서기 110년경 인쇄된 중국 지폐에는 ‘위조범은 참수형에 처할 것이고 제보하면 크게 보상 받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초기 지폐 인쇄판조차도 위조품이다. 위조지폐와 화폐 사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범죄다. 우리는 화폐가 교환의 수단으로 생겨나 그 목적에 맞게 쓰이고 있다고 믿지만, 돈을 둘러싼 탐욕과 어두운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토록 돈을 선망하는 걸까.

『세계사를 바꾼 돈』에서 저자 안계환은 “동서양 문명을 연구해보니 인간의 경제적 욕심, 즉 돈에 대한 욕망이 역사를 바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사의 변곡점으로 여겨질 만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돈이 어떻게 인간들을 움직이고 조종하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활약했는지 밝혀낸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돈의 힘과 부에 대한 열망이 작용한 결과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대선 주자로서 너무 많은 흠결이 드러난 탓에 자질 논란이 잦았던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고 외쳤을 때, 유권자들—특히 백인 유권자들—은 그가 무엇보다 미국 경제를 우선시하고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챙길 적임자라고 여기게 됐던 것이다. 이런 선택은 미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있어왔다.

2-각자도생 시대의 생활 백서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친구들과 오랜만에 모인 자리였다. 여느때처럼 연애나 결혼, 일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새로운 주제가 등장했다. “너도 요즘 주식 투자해?” 미적지근해졌던 수다에는 어느새 다시 불이 붙었다. 어느 주식에 투자해서 얼마를 잃었고 얼마를 벌었다는 경험담부터, 지금 들어가도 늦지 않을까, 가상화폐는 어떨 것 같은지, 누구는 대출을 얼마나 받아서 집을 샀다더라 하는 이야기까지 신나게 오고 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를 쫑긋 세워가며 한참 이야기에 빠져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친구들까지 이렇게 돈에 전전긍긍하고 노후를 불안해하는 이유가 뭘까? 돈에 대한 달뜬 관심이 비단 일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퇴직 후의 경제활동으로 여겨졌던 투자 방식들에 최근 젊은 세대들이 대거 뛰어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투자자층의 유입으로 활기를 띤 개인주식투자 열풍은 미국의 ‘로빈 후드’ 한국의 ‘동학개미’ 일본의 ‘닌자개미’ 중국의 ‘청년부추’ 등과 같은 신조어가 방증했다. 그렇다. 현재 젊은 세대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돈이다.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대체로 1980년대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한 인구집단을 일컫는다. 이들은 10대 즈음부터 인터넷, 스마트폰, SNS 등을 접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온라인 경험을 빠르게 습득한다. 밀레니얼 세대를 구분 짓는 뚜렷한 특성이 한 가지 더 있다. 저성장 시대를거치면서 부모 세대나 이전 세대보다 소득이 적어졌고, 사회진출 시기에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일자리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그런 탓에 소비, 투자, 고용 등 경제활동에 있어 이들의 시장 진입이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역사상 가장 풍족하게 자라났으며 높은 대학 진학률, 풍부한 해외 경험이 있는 세대이기에 상대적인 박탈감과 불만족은 더 크다.

이코노미스트 홍춘욱과 KBS 경제 전문기자 박종훈은 『밀레니얼 이코노미』에서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직면한 위기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고령화 속에서 미처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은퇴 시기가 미뤄지고, 기술의 지식과 생산성이 사람을 능가하기 시작하면서 밀레니얼 세대의 일자리와 소득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와중에 청년층 비정규직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도 더욱 커지면서 ‘좋은’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폭증했다. 좁아진 취업문 탓에 구직 기간은 길어지고 취직을 위해 과도한 시간과 노력, 자본을 투자한 이들은 타협하듯이 직장에 취업하지만, 곧 일자리 미스 매치mismatch의 문제를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밀레니얼 세대의 고용 형태는 점차 긱gig 노동 혹은 프리랜서로 바뀌어 가고 있다. 1920년대 미국 재즈 클럽에서 단기간 섭외한 연주자들의 공연인 ‘긱’에서 유래한 긱 노동은 ‘디지털 장터에서 거래되는 기간제 근로’로 정의된다. 이러한 노동 환경의 유연함을 선호하는 노동자도 있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사실 기업 차원에서 더 환영할 만한 것이다. 기업이 필요로 할 때만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고,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어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건강보험이나 고용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으로부터 보호받기도 어렵다. 이렇듯 급변하는 사회와 노동 환경 속에 놓인 밀레니얼 노동자들은 최선을 다해 경제활동을 하더라도 돈에 대한 불안감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3-기본소득과 실질적 자유
비트코인 투자 열풍이 처음 불었던 2017년, 이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젊은 세대가 부모에게 물려받지 않고 목돈을 만들 마지막 기회”였다. 그 이후 4년간 수도권의 집값은 폭등했고, 코로나19로 골목 경제까지 황폐해졌던 지난해에는 주요 국가들의 주식시장이 역대 최고 수준의 활황세를 보였다. 개인 주식투자자의 별칭이던 ‘개미’는 이제 국내에 투자하는 ‘동학 개미’와 해외 기업 투자자인 ‘서학 개미’로 분화됐을 정도다. 그리고 지난 4년간 지지부진하던 비트코인의 가격도 다시 급격히 올랐다.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높다는 것을 방대한 자료로 증명해 ‘불평등’이란 의제를 경제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공론장의 핵심 화두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책의 방대한 자료를 굳이 접하지 않아도 ‘돈은 일해서 버는 게 아니라, 부동산이 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최근 젊은 세대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 투자에 나서는 현상을 단순히 혀를 차며 볼 수는 없다. 스펙을 쌓아도 좋은 일자리는 극히 적고, 만일 그런 일자리에 진입한다고 해도 자산을 축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도 적고, 부동산에 투자할 만한 자금도 없는 이들은 어떨까. 이미 만연한 불평등 때문만이 아니라,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에 더 절망스러울 것이다.

April21_Topic_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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