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노인

에디터 : 박주연 전지윤 현희진

‘노인’ 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다. 어릴 적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던 할머니, 등이 기역 자로 굽은 채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이름 모를 할아버지. 느린 발걸음과 호탕한 웃음소리. 물론, 세상에는 납작한 단어 몇 개로 모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노년의 삶과 빛깔이 있다. 길고 긴 삶의 궤적이 그려진 여러 얼굴을 상상해본다. 그러다가 결국 거울 앞에 서는 것이다. 언젠가 마주할 가장 가깝고 낯설 노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노인에게 귀 기울이는 일은 과거와의 연결이면서 현재의 사건이면서 미래를 헤아리는 과정이었다. 아직 닿지 못한 시간이라 조금 엉성할 수 있으나, 되도록 정확하게 응시하고자 했다. 노인에 대한 익숙한 편견과 섣부른 깨달음은 거절하려 애썼다. 여기, 나이 들어가는 모든 존재를 위한 이야기가 있다.

할매의 탄생
『할매의 탄생 : 우록리 할매들의 분투하는 생애구술사』에 열렬히 기록된 경상도 깡촌 할매들의 산전-수전-공중전 방불케 하는 생애사를 한바탕 들었다. 할매들이 사는 대구의 우록2리가 얼마나 산골짜기인가 하니 이곳 주민들은 한국전쟁 때도 잠깐 피신했다 다시 나와 농사일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해방 소식도 뒤늦게 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 시집오면 줄곧 이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내니 그 경력이야 말하면 입만 아프고 시집살이 역시 범접불가한 능력치다. 단지, 가방끈이 조금 짧아 약 봉투에 적힌 글을 읽을 줄 모를 뿐이다. 그러나 할매들은 억척과 열정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위인들이라 한번 머리에 입력된 건 하나도 안 잊어버리려 애를 쓰니 한글 선생님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로 금방 잘 할 거고, 마실 할마이들이 ‘할마이 빈호사 셋 나오겠다 마’ 하고 웃었지만 진짜 그럴까 싶어 도리어 걱정이다.

나이 듦과 나
언젠가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화두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로 바뀌었다. 그 때문인지 노인들에게 시선이 자주 머문다. 느릿느릿 걸으며 사소한 것 앞에 한참을 멈춰 서서 바라보는 노인들. 앞서가던 굽은 등의 할머니를 따라가며 그 몸안에 살고 있을 영혼을 짐작하다가 결국 나도 훗날 나이 든 몸 안에 지금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영혼이 살아가게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닿는다. 광화문부터 시청까지의 길에서는 불신지옥을 외치며 확성기로 천당을 가자고 열을 올리는 노인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저들의 삶은 적어도 홀로 우두커니 존재하는 삶보다는 훨씬 행복한 삶이겠지.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옳고 그름을 떠나 신념에 가득 차 불꽃을 태우고 있는 하나의 생명을 열렬히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자주 지나치는 길목에 꽤 큰 규모의 노인복지센터가 하나 있는데, 하루는 그곳 담벼락에 붙은 게시판을 본 적이 있다. 노인들 각자가 소원하는 바를 자필로 적어 놓은 게시판에는 가족의 평안과 자신의 건강을 염원하는 글도 있었지만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다’와 같은 구체적인 삶의 열망을 담은 문구도 여럿 있어 가슴이 쿵쾅거렸다. 노인이 되어도 사랑을 기다리고 원하는 인간의 순수한 바람은 절대 시들지 않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노인, 장소, 환대
윤성희의 소설 「어느 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주일 전,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쳤다. 다음에는 이런 문장이 따라온다. 손잡이에 거북이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분홍색 킥보드였다. ‘나’는 노년의 여성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욕이 느는 남편을 견디기 어렵다. 자꾸만 미친놈 미친년하고 욕을 하는 남편의 모습은 술만 마시면 가족을 두드려 패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저이가 왜 저렇게 되었을까? 남편을 미워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밤이면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 단지 주변을 돈다. 그러던 어느 밤, 그만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만 것이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차가운 거리에 꼼짝 못 한 채 누워 있는 할머니를 발견한 건, 어떤 청년이다. 청년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평소에는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고, 어머니가 출근했을 아침에야 집에 들어가 남은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 그런 생활을 한지도 삼 년이 넘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와 청년은 짧고 명랑한 우정을 나눈다. 청년은 할머니에게 고백한다. 사람들한테는 고시 공부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여동생이 뺑소니 사고로 죽은 후 성공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사라졌다고. 할머니는 청년의 손을 잡으며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June20_Topic_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