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l of Tales 동화 꼬리잡기

깊은 어둠을 견디는 힘

에디터. 전지윤 자료제공. 문학동네

몇 년 전, 트위터에서 보았던 한 장면을 기억한다. 지구에 단 한마리 남아있던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사망을 애도하는 짧은 메시지와 사진이었다. 케냐의 올페제타 보호구역에서 찍은 사진 속엔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려는 듯 보이는 노쇠한 코뿔소와 침통한 얼굴로 친구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육사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고단한 삶이 막을 내리는 순간, 엷은 미소를 띤 듯한 코뿔소의 표정은 마치 친구를 위로해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영물의 죽음으로 이제 지구상에는 단 두 마리의 암컷 북부 흰코뿔소만 남았다.
긴 코가 없는 코뿔소
코뿔소 노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가족을 잃은 어린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코끼리 고아원이다. 비록 노든은 다른 코끼리들처럼 코가 길어지거나 귀가 커지지 않았지만, 코끼리들은 모두 그를 따뜻하게 보듬었다. 처음에 노든은 이곳에서 코끼리답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생활하면서 평생 지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꾸만 자신에게는 왜긴 코 대신 뿔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고아원 밖으로 나가 다른 코뿔소들을 만난다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코뿔소로서 삶을 살아보라는 코끼리들의 격려에 힘입어 노든은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야생에서 노든은 비로소 코뿔소다운 삶을 살 수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특별한 코뿔소”가 되는 경험도 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얀 뿔을 노린 밀렵꾼들에 의해 갑작스레 아내와 딸을 잃게 된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아내와 코를 맞대던 그 순간부터, 노든에게 생은 그저 “밤보다 길고 어두운 암흑”일 뿐이었다. 동물원으로 이송된 그에게 코뿔소 친구 앙가부가 다가왔다. 그는 실의에 빠진 노든에게 매일 말을 걸며 위로와 용기를 조금씩 심어주었다. 그러나 동물원에 침입한 밀렵꾼들로 인해 노든은 하나뿐인 친구마저 또 잃게 된다. 그의 암흑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가 되는 순간
치쿠와 윔보는 동물원 밖의 삶을 모르는 펭귄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코끼리 고아원의 코끼리들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보탠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은 검은 반점이 있는 알을 데려와 다른 어떤 부모보다도 정성을 다해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귀가 먹을 것 같은 큰 소리”가 들리며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고, 동물원의 철조망과 벽이 무너졌다. 윔보는 커다란 철봉에 깔려 죽어가면서도 몸으로 알을 감싸 보호했고,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아는 치쿠는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그의 품에서 알을 꺼내어 동물원 밖으로 도망쳤다. 치코에게도 노든 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암흑이 내려앉았다.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동물원의 유일한 생존자인 노든과 치쿠, 그리고 아직 부화하지 않은 펭귄알의 동행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언뜻 보기에 셋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끈끈해졌다. 노든과 치쿠는 서로가 있어서 끔찍한 기억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고, 알이 부화하도록 정성을 기울이며 조금씩 상실의 아픔을 치유해 나갔다. 각자의 가족과 친구를 대신하며 ‘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야생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가기에 치쿠의 몸은 너무 약해져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치쿠는 알을 바다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노든의 곁을 떠났다.
함께라는 희망
치쿠의 죽음으로 긴긴밤이 그 지긋지긋한 늪으로 노든을 다시 끌어당기려던 때, 알을 깨고 펭귄이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코끼리가 키운 코뿔소는 펭귄의 아빠가 되었다. 아내와 딸, 그리고 앙가부의 죽음을 갚기 위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노든 생애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나 아기 펭귄이 세상에 나오면서 그 목표는 미뤄지고, 노든은 자신들을 기꺼이 희생한 치쿠와 윔보의 몫까지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아기 펭귄은 노든과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 치쿠의 부탁처럼 마침내 바다에 다다를 수 있을까….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인생은 아름다워
작가 루리는 동화책과 그림책을 좋아해서 직장 생활을 하며 작품을 쓰다가 작가로 전업하였고, 『긴긴밤』으로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2018년 마지막 하나 남은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죽음을 뉴스로 접한 뒤, 그 일화를 모티브로 장편동화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한다. 『긴긴밤』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동물들의 고단한 삶과 비극, 그리고 실존했던 수단의 온화했던 마지막 눈빛이 생생하게 오버랩 되어 눈물을 자아낸다. 비록 인간에 의해 멸종에 이르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갖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동물들의 품위와 고귀함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슬프고 아득한 시기를 의지와 희망으로 연대하며 견디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긴긴밤 또한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January22_TailofTales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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