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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1

SF에서 순정만화의 계보를 찾다

글.최재천

SF 전문출판사 아작 편집장. “내겐 새 책이 있고, 책이 있는 한, 난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_ 조 월튼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
전혜진 지음
구픽

책을 읽는 이유가 다양한 만큼, 책을 쓰는 이유 또한 여러 가지다. 소설가 문목하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초대하지 않는 손님이 문 따고 들어와서 집안을 뒤지고 뭐 먹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얘네를 내보내려면 어떻게든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문득 찾아온 이야기들을“구토하는 심정으로, 다 내뱉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청탁을 거의 받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찌 보면 ‘신내림 같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이유로, 차오른 이야기들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작가 유형이다.
조금 다른 유형으로, 정말 읽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도 써주지 않아서” 에라, 내가 쓰고 말지 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를테면 소설가 전혜진이 그렇다. 전혜진 작가는 2007년 소설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해 만화 스토리작가로 활동하면서 SF와 판타지, 호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는가 싶더니 2019년에는 장편소설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를 발표하며 디스토피아 소설보다 더 절망적인 현실을 다루기도 했다. 문학뿐만이 아니다. 옛 귀신 이야기들 속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성, 귀신이 되다』라는 책을 쓰는가 하면, 최근에는 불가능한 꿈을 실현한 29명의 여성 수학자들의 삶을 돌아보는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를 발표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에도 관심을 가져 『우리 반마리 퀴리』 『우리 반 에이다』를 쓰기도 했으니, 그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30여 년의 덕력 에너지를 끌어모아 쓴 책이 있으니, 바로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이다. 전혜진 자신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기에, 애정을 담아서 혹은 어쩌면 숭고한 의무감으로 썼을 책은 제목 그대로 1987년부터 2020년까지 발표된 30여 편의 대표적인 순정만화를 통해 작가 자신의 계보를 밝힌다. 강경옥의 『별빛속에』, 김진의 『푸른 포에닉스』부터 시작해 서문다미의 『END』를 거쳐 천계영의 『좋아하면 울리는』까지, 전혜진은 여자들의 작품이라 홀대당하고, 기록되지 않고, 지워지고 잊힌 작품들, 혹은 “순정만화치고는 훌륭하다”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듣거나, 몇몇 SF 팬들에게 무시당하던 작품들을 하나하나 발굴해 꼼꼼히 소개했다. SF 작가이자 순정만화 스토리작가로 활동해온 전혜진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뿌리가 순정만화라고 선언했을 때 김보영을 비롯해 많은 SF작가들이 이에 동의를 표하며 호응했다. 다독가로 유명한 전혜진이 순정만화를 통해서만 SF를 즐긴 것은 당연히 아니었겠지만, 작가가 소개한 순정만화들이 그의 풍성하고도 다채로운 SF적 자양분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고백건대, 나는 책에서 소개한 작품들 대부분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책에서 비판한 편견 그대로, 순정만화를 그저“여자애들 보는 만화”, “눈 큰 여자애들이 연애나 하는 이야기”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편견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계속해서 애정을 갖고 출간하는 SF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애들이나 읽는 소설”이라고, “허무맹랑한 공상과학소설 같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무언가를 후려칠 때나 언급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요즘에서야 책에 소개되는 순정만화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서 보는 중이다. 우리의 친절하고도 다정한 전혜진 작가가 부록을 통해 책에 소개한 작품들의 종이책 유무는 물론, 서비스되는 플랫폼까지 모두 빼곡히 기록해둔 덕분이다. 더 다양한 SF를 즐기는 데에, 근래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한국 SF에서 순정만화의 계보를 찾는 데에, 그의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