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Report

호주 멜버른, 『더 셜리 클럽』The color of love

에디터. 정현숙 / 그림. 가브리엘라 지안델리 / 자료제공. 루이 비통 © Louis Vuitton / Gabriella Giandelli

단번에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들이 있다. 우연히 발견한 그 시절의 일기장이나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같은. 특히 후자의 경우 이제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생소할 정도로 추억의 물건이 됐다. 소형 자기테이프 저장매체인 카세트테이프는 음질이 영구적이지 않아서 더 오래 더 자주 듣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고, 보관법도 꽤 까다로웠다. 이 귀엽고 연약한 물건에게는 흥미로운 이력이 하나 있는데, 바로 대한민국 사랑 고백의 역사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신만의 애청곡과 구애의 말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좋아하는 상대에게 선물하던 시절, 그 작은 카세트테이프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네 수줍은 침묵을 대변했다. 여기, 과거에서 보내온 누군가의 달뜬 색색의 고백을 슬몃 꺼내본다. 모든 게 멈춤에서 다시 재생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그해 11월 2일, 스무 살 설희는 호주 멜버른에 도착한다. 한국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기 위해 택한 워킹홀리데이였다. 설희는 자신의 한국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셜리’를 영문명으로 정한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좀더 세련된 이름으로 바꾸라고 제안한다. 알고 보니 ‘셜리’는 유행이 한참 지나버려서 1970년대 이후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붙이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 한국으로 치면 ‘자’나 ‘숙’ 자로 끝나는 옛날식 이름이랄까. 하지만 설희는 계속해서 셜리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 이름이 지닌 사랑스러움이 무척 좋았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교외의 치즈 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던 설희는 1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멜버른 커뮤니티 페스티벌’을 관람하러 간다. 각종 퍼레이드의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 무리가 설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더 셜리 클럽 빅토리아 지부’라 쓰인 보라색 테두리의 현수막을 든 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는 할머니들. 자세히 보니 그들이 달고 있는 명찰에 모두 ‘셜리’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그 순간 설희는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등단하기 전, 작가 박서련은 스물다섯 살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1년간 호주에 머물렀다. 2014년 1월 ‘호주의 날’ 기념일에 열린 퍼레이드에서 ‘더 셜리 클럽’의 행진을 목격한 그녀는 이 클럽을 소설의 소재와 제목으로 차용한다. 더 셜리 클럽은 호주에 실제로 존재하는 모임으로, 지역마다 지부가 있는 전국 단위의 클럽이다.(www.shirleyclub.org) 당시 작가 자신의 영어 이름도 ‘셜리’였기에 클럽의 존재를 알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용기가 없어 가입하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셜리와 달리, 소설 속 설희는 인파를 뚫고 클럽 무리에 성큼들어가 그들을 따라 걷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 즉 허구와 실제 경험은 갈라진다.
자신과 같이 수많은 셜리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던 설희는 할머니들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그들의 뒤풀이 장소인 한 스포츠 펍까지 따라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S를 만난다. 독특한 억양의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그의 목소리는 설희를 다시 한번 가슴 뛰게 만든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색깔인, ‘거의 완벽한 보라색’을 닮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설희처럼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서든 크로스 역 앞 카페의 바리스타로 일하는 S.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설희의 세상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다. S와는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 즐거웠다. 둘은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앞에서 거대한 말로 체스 시합을 하고, 스완튼 스트리트에서 버스킹 공연을 본다. 어느 날엔 한 개러지 세일에 놀러 가서 서로가 갖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을 하나씩 골라 선물하기로 한다. S가 고른 건 재생과 녹음이 모두 가능한 워크맨이다. 설희가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라 생각하던 물건이었다.
설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인지한다. 선인장꽃처럼 진한 분홍색, 노란색을 조금 섞은 다홍색 등 소리를 색깔로 연상하고 구별 짓는 식이다. 『루이 비통 트래블 북』 〈호주〉 편을 작업한 작가 가브리엘라 지안델리Gabriella Giandelli에게도 색깔은 일생의 주제이자 철학이다. 그는 빛과 색을 잃은 듯한 현실 속 작은 구멍들을 수백 자루의 색연필로 채워간다. 형형색색의 온기를 불어넣는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과 괴로운 생각과 해묵은 감정들은 서서히 지워진다. 그 결과, 드넓은 색채의 화폭에는 오직 따스함과 사랑의 힘만이 자리한다. 낯선 환경과 문화 속에 체류하는 것 역시 새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을 터. 설희가 호주에서 그려나간 그림은 다채로운 소리들이 만들어낸 색으로 채워진 것이라 더욱 특별하다.
어린 동양 여자가 자신도 셜리라며 클럽에 가입하겠다고 하자 호주인 셜리 할머니들은 갸웃하지만, 이내 설희는 임시 명예회원이 된다. ‘재미, 음식, 친구’를 신조로 삼는 클럽 회원들과 함께, 설희는 나이와 피부색을 떠나 한 명의 셜리로 환대 받으며 즐거운 추억들을 쌓아간다. 이들 공동체는 서로를 진심으로 돌보고 아낄 줄 안다. 치즈 공장에서 일어난 작은 파동으로 설희가 부당하게 해고되자,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셜리 벨머린 할머니는 나서서 항의한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설희는 결국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서로의 마음이 닿을 즈음 홀연히 사라진 S를 찾아 ‘워킹’은 그만두고, ‘홀리데이’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S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설희 앞에는 곳곳마다 또 다른 셜리 할머니들이 등장해 S를 만나도록 돕는다.
July22_Melbourne_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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